무극신 2022. 6. 19. 15:44

환웅 집단이 태백산에 올 때를 기억하시나요?

 

이때 이주 후보에 삼위산도 고려했었죠?

 

환웅은 태백산으로 갔지만 환국에서 일부는 삼위산으로 이주했으며,

이들 후손이 차츰 천수시 서안시 그리고 황하 인근으로 이동하였어요.

고고학적으로 당시 서안과 하남의 문화를 앙소문화라고 해요. 치우 이후 산동, 하남, 산서 문화를 용산문화라고 하죠.

 

삼위산으로 간 사람들 후손의 정착

 

따라서 환웅 집단과 삼위산으로 이동한 집단과는 가까운 사이인 것이죠.

 

예를 들어 서안에 정착한 집단 중 신농씨라고 하는 씨족의 장이 유명한데,

환웅 집단 중에 고시라는 분의 친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어요.

 

한편 신시가 발전하다가 타격을 받는데, 아마 바이러스로 추정돼요.

동물을 기르고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바이러스에 취약해진 것이죠.

 

바이러스로 인하여 다시 사람들이 분산되어 살면서 농업 등 경제력이 약해진 것은 아닐까요?

 

치우천왕이 산동성으로 나라를 옮긴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치우천왕 나라를 옮기다

태산에서 회수사이는 비옥한 토지로 농업에 유리하고, 바다와 가까워 무역, 어업에 유리했던 것이죠.

 

기원전 27세기 경 치우천왕은 현재 중국 산동성으로 나라를 옮기고 이름을 청구국이라 해요.

청구는 요서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요.

백년 단위를 세기라고 해요. 기원전 27세기는 2700~ 2601년인거죠.

    청구는 이후 우리나라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돼요.

 

 

 

헌원과 치우의 전쟁

 

 

산동성에 정착한 치우는 영토를 더 넓히는데,

산동성 곡부에 있던 소호 금천씨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하남성엔 있던 신농씨의 후예인 유망을 공격 점령하게 돼요.

 

치우천왕 하남성과 회대를 점령하다

치우천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유망 등은 석기를 사용했으나

치우 군은 청동기를 사용해서 무기에 우위가 있었기 때문이예요.

청동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볼께요.

 

한편 헌원이 군사를 모아 치우에 대항했는데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으로 10여년간 괴롭히면서,

점차 청동기를 습득하게 되어 무기의 우위가 없게되자  탁록이란 곳에서 최후의 전투를 하게 돼요.

 

탁록 전투에서 치우천왕이 전사하였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말로 생각되네요.

 

왕이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은 흔하지 않는 데다,

치우 무덤이 탁록에 있지 않고 산동성에 있으며,

전투에서 이겼다는 헌원은 정착하지 못하고 군사로 호위해서 병영 생활을 했다는 등

 

또 헌원의 묘가 연안시에 있는데, 하남성이 본인의 주 영역임을 생각하면,

뭔가 맞지 않아 와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탁록과 치우와 헌원의 무덤 위치

 

아마 탁록 전투에서 헌원이 승리한 것은 아니고,

치우 군의 손실도 커서 헌원과 치우천왕 간 휴전 협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협정은 헌원은 서안, 임분시를 차지하고 치우는 하남성을 차지하는 것으로 체결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헌원의 군대를 운사라고 하는데 치우천왕으로부터 받은 작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치우 사망 이후 하남성은 다시 헌원의 후예에게 반환한 것으로 생각되네요.

 

한편 전투가 벌어진 탁록을 하북성 탁록현이라고 후대 누군가 착각을 했는데

이게 현재까지 잘못 전해지고 있어요,

전장이 주로 산동성, 하남성, 산서성인데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거죠.

 

하북성 탁록현은 탁록이 아니다

 

묘족과 치우

 

현재 중국에 있는 묘족이 치우를 조상으로서 줄곧 제사를 지내고 있다네요.

우리는 치우천왕을 잊고 있는데 부끄러운 일이예요.

 

묘족은 치우가 오기 전에 회대 지방에 거주하던 선주민으로 생각되네요.

신시 사람들이 회대 지방으로 내려와 거주하였고,

치우천왕의 회대 점령으로 묘족과 치우 집단 간 융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네요.

 

묘족

 

 

전쟁의 의의와 중국의 시조

 

 

치우와 헌원, 유망 간의 전쟁은 환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 간 전쟁인 것이죠.

 

이주 후 천 년이 지났기에 동족 의식은 약화되었고,

헌원은 토착인으로 치우천왕에 강하게 반항하였던 것이구요.

 

한나라 때 역사가였던 사마천은 헌원을 중국의 시조라 하고,

 

헌원 전욱 고신 순으로 5(()는 씨족의 장으로 생각하면 되요)가 있었고,

이후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로 이어진다고 봤어요.

그리고 헌원을 황제(黃帝)라고 높였구요.

 

사마천이 헌원을 시조로 본 것은

헌원의 성이 희()씨이고, 주나라 왕의 성이 희()씨이니 시조라 한 것이죠.

 

사마천의 역사 인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완성된 사고를 정리한 것이고,

이후 중국의 전통이 된 것이죠.

 

한편, 최근 중국은 신농씨, 헌원씨, 치우를 중국의 세 시조라 하고 숭배 작업을 하고 있어요.

또 헌원을 홍산 문화와도 연결시키고 있죠.

이는 홍산 문화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치우까지 중국사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예요.

 

문제는 중국의 역사로 보는 것이 맞느냐 하는 것이죠.

 

이는 결국 중국의 의미와 범위로 귀결되는 데요.

 

중국의 개념은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되었고 이는 종족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토적인 개념인 거예요.

 

우리가 중국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하는데 이는 진나라와 한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이 통일되었는데 한나라의 통치를 받는 백성을 한족이라 부르는 거예요.

 

따라서 중국의 범위는 한나라 통일 당시 즉 만리장성이 중국의 영토 한계가 되는 것이죠.

 

만주, 내몽고, 티벳, 신장 지구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며 중국의 역사에 포함할 수 없는 거예요.

 

이는 중국의 전통 역사인식이고, 현재 중국 역사 인식은 전통과 맞지 않는 거예요.

 

지금 중국의 역사 인식은 현재 영토를 가지고 소급해서 중국의 범위를 정하고 있는 데요.

 

현재 영토 기준으로 역사 범위를 정한다면,

중국의 영토가 계속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면

영토에 맞추어 중국의 역사도 늘어나거나 줄어드니,

 

중국의 역사 범위에 대한 인식은 결국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마는 거예요.

 

따라서 현재 중국이 벌이고 있는 치우를 시조로 삼거나,

홍산 문화를 중국의 역사로 포함하는 것은 매우 맞지 않는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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