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도성 공격에 동원된 마한의 정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69년, 70년 태조왕의 현도성, 요동 공격에 마한과 예맥 군사가 동원되었다.
이 기록에서 갑자기 등장한 마한을 두고
김부식은 온조왕 27년 마한은 멸망했는데, 혹시 다시 부흥한 것인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신미제국(본 블로그 역사논문 게시판 참조)을 통해서 마한이 존재함을 알고 있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때 이런 기록들을 소홀히 하였으며,
삼국사기를 편찬한 동기가 말하듯이
당시 고려 관료들이 우리 역사에 너무 무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 때 한국 역사를 아는 학자가 참여했다면
암호 같은 역사서가 아니라 더 풍성한 삼국사기가 되었을 것인데 아쉽다.
1. 학계의 주장
태조왕 때의 마한에 대해서 “마한의 유민”이라는 설이 다수설이다.
백제 온조왕의 마한 정복 때 항거한 마한의 여러 성이 있는데,
이들 마한 유민들이 고구려로 갔다는 주장이다.
유민설은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랬을 것 같다라는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고구려, 신라로 이동이 가능하였으므로
불가능한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온조왕 당시 마한 유민이 고구려로 이주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고구려 사회에 융합되었을 것이고
마한이란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했을 것이다.
고구려가 아닌 한(漢)나라 군현으로 이동했을 때
마한의 정체성은 유지하며 살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신미국 등 많은 나라의 등장 규모로 보았을 때
이들을 단순 유민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마한 유민설은 마한의 영역을 현대 남한으로 설정한 데서 나온 것이다.
마한의 영역을 확장하면 유민이 아닌 원주민이 된다.
마한 유민설은 결국 ‘마한의 영역’이란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2. 태조왕의 현도성 공격 분석
삼국사기 태조왕 69년, 70년 기록을 다시 보자.
「태조왕 69년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로 하여금 2만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함께 싸우토록 하였으며, 아군이 대패했다.
태조왕 70년 왕이 마한 예맥과 더불어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파하였다.」
태조왕 69년, 70년 전투 지역은 다르다.
69년 현도성을 공격한 것이고 70년은 요동을 공격한 것이다.
69년은 공격 대상이 특정되어 있고, 70년은 공격 대상이 광범위하다.
69년 현도성 공격은 기병(騎兵)이었고, 70년은 기록되지 않았다.
69년 공격이 기병이었다는 것은 공격의 신속성 또는
공격 장소가 먼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요사지리지에 파림좌기가 한나라 서안평현이란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무시하지만 파림좌기가 현도군과 관련된 어떤 연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69년 공격에 동원한 기병이 1만이나 된다.
만약 전투에 패한다면 엄청난 재정 손실로 고구려의 국력은 약해진다.
그럼에도 이런 공격을 감행한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부여(비리국)의 참전으로 고구려가 패하는 데,
고구려의 신속한 공격은 현도군과 부여의 연합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고구려가 공격한 현도성은 군사시설로 봐야 한다.
보통 요동군, 현도군과 같이 군(郡)으로 표현하지 성(城)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제3현도군 지방통치조직은 구려에 설치하고 파림좌기에 성을 쌓은 것으로 봐야 한다.
태조왕 70년 공격은 69년 실패에 따른 재공격이다.
그런데 공격 대상이 요동으로 포괄적인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는 69년 공격대상인 현도성과 제3현도군, 부여까지 모두 공격한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70년 공격은 보병도 참여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70년 이후 전투가 없는 것은 고구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은 다소 모호한데,
원문은 扶餘王遣兵救破之인데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깨뜨렸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깨뜨렸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앞 해석은 구원으로만 기록해도 될 것을 깨뜨렸다는 불필요한 말을 적은 것이므로
뒤 해석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고구려사략을 보면
70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현도성은 파괴되었고, 제3현도군은 고구려의 관할이 되었고,
부여는 근거지를 버리고 후른베이얼시 인근으로 이동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 북쪽에 약수(弱水)가 있다고 하였는데,
약수란 흑룡강을 말하며
학계와 같이 부여를 장춘, 농안으로 비정한다면 삼국지 기록과 맞지 않게 된다.
3. 태조왕기 마한의 정체
역사 기록이 갑자기 등장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해당 기록의 인근 기록을 먼저 살펴야 한다.
태조왕 69년 12월 이전 어떤 일이 있었을까.
- 태조왕 69년 4월 선비와 함께 요대현 공격
- 태조왕 69년 봄 현도, 요동 2군 공격
- 태조왕 66년 6월 예맥으로 현도 화려성 공격
- 태조왕 53년 요동 6현 약탈
태조왕 69년, 66년 기록으로는 마한과 연결시킬 수 없다.
태조왕 53년 요동 6현 기록에 마한과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6현의 대상이 보이지 않지만,
박창화 고구려사략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6현 중 둔유현과 문현 그리고 뒤에 점령한 평곽현을
마한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평곽현을 대석교시에 비정하는데,
한서지리지에 평곽현에 철관과 염관이 있어 철과 소금이 산출됨을 알 수 있는데,
대석교시에 철 생산지가 있기 때문이다.
둔유현은 개주시로 판단되며, 문현은 요하 인근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후에 서진과 교섭하는 신미국 등 마한 여러 국가가 있다.
신미제국의 마한은 요동반도 ~ 평안북도 해안으로 판단된다.
신미제국 이전 태조왕 때는 요동반도 전체가 마한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고구려사략에서 태조왕 69년 예맥은 구다국과 개마국으로 표현되었다.
고구려는 점령된 지역에서 군사를 차출하여 현도 공격에 동원한 것이다.
따라서 태조왕 69년 마한은 둔유현, 평곽현, 문현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4. 요동반도가 마한에 속한다는 의미
개주시가 마한이라면 요동반도가 마한에 속한다는 의미가 된다.
학계의 주장처럼 마한 유민이 북상하여 이주한 것이 아니라
원주민이 마한 사람이란 의미가 된다.
학계는 북한이 고조선이고 남한은 진국이며 진국이 삼한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요동반도가 마한에 속한다고?
이렇게 되면 신채호의 전삼한설,
그리고 환단고기의 전삼한설, 중마한설아 타당하다는 의미가 된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한탁이 남하하여 삼한을 설립했으며,
이것이 중마한이라고 하였다.
전마한은 요동반도까지 마한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한탁이 설립한 중마한은 요동반도와 교섭이 없었을까?
한탹이 중마한을 설립한 기원전 2세기말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구려 태조왕 69년(121년)에도 여전히 요동반도를 마한이라 했다는 것은
중마한의 영역이 요동반도까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한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작성 연대는 3세기로
가야가 등장하므로 중마한이 아닌 후마한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삼한의 위치가 기술되어 있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과 서가 바다로 한계가 되며
남으로 왜(倭)와 접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말한 대방은 대방군을 의미한다.
대방군은 둔유현 이남 황무지에 설치한 것으로
둔유현이 개주시이므로 대방군도 요동반도에 설치한 것이다.
대방군의 대방 이름은 낙랑군의 대방에게서 왔다.
대방군의 속현이 7현이라면
요동반도 전체가 대방군 영역으로 보기 어렵다고 본다.
서진과 교섭한 신미제국의 위치가 요동반도 우측 해안 지역으로 보이므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기술된 3세기에도
삼한의 북쪽 한계는 요동반도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3세기 삼한의 영역이 그러하다면
학계의 현 삼한 위치는 전부 다시 설정해야 한다.
현대 한국과 관련해서도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 온다.
다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문장을 보자.
「환령지말 한예(韓濊)가 강성하여 군현이 통제하지 못해 인민이 많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환령은 후한의 환제(146년 ~ 168년)와 영제(168년 ~ 189년)을 말하며,
군현은 대방군 설치 이전이므로 낙랑군을 말한다.
요동군 지역은 고구려 태조왕이 점령하였다.
한예가 강성하다는 것은 고구려의 요동 점령을 말한다.
백제, 신라, 가야 지역도 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의 성장을 한나라 군현이 제어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2세기말은 후한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고구려가 강성해서 요동을 점령하였고
낙랑군 내 사람들이 한반도로 많이 이주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 문장에서 사용된 한국 용어 이미지를 현재 남북한으로 비교할 수도 있다.
당시 한국은 요동반도 일부와 일본 구주까지 그 영역으로 하고 있으므로
지금 남북한의 영토보다 훨씬 크다.
요동반도 이남이 한국이라면 평양에 있는 낙랑 문화와 관련이 궁금해진다.
당시 평양은 고구려가 한성(漢城)이라고 불렀으니
한나라 사람들이 있었으며 313년 고구려가 점령한다.
평양에 있던 한나라 사람들과 한나라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