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계의 주장
낙랑군 둔유현은 공손강이 196년 ~ 220년 중에 둔유현 이남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만들었기에 대방군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무위키에서 검색하면 낙랑군 둔유현의 위치를 황해도 황주군으로 비정하고 있다.
대방군의 치소를 황해도 사리원시 봉산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며
나무위키 자료는 학계의 견해로 생각된다.
낙랑군을 평양으로 보는 것은,
위만조선의 수도와 더 위로 기준의 수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낙랑 유물과, 낙랑군 호부 등을 그 근거로 들고 있으나,
고고학 유물은 얼마든지 다르게 말할 수 있으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안된다.
낙랑군을 평양에 두게 되면 수 많은 의문이 생겨나는데,
그중 근본적인 의문은
우세한 전력을 가진
한나라가 왜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106년 제3현도군에서 보듯이
한나라는 고구려에 의해 영토를 잃어도
끝까지 그 관할 기구를 유지한다.
그만큼 영토 욕망이 크다.
그런데,
한반도 남부라는 작은 땅에서
강한 군대가 약한 군대와 접경을 하고 있는데 전쟁이 없다?
이런 의문에 학계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데
학계의 주장은 뭔가 오류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둔유현의 위치 비정
106년 제3현도군 설치 때 기존 3현 외에 요양현 등이 추가된 것은
105년 고구려의 요동 공격과 관계가 있다.
삼국사기엔 고구려 군사가 패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구려사략에 의하면 이 전쟁으로 6개 성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106년엔 요양까지 점령하여 요동태수를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다.
여러 전투 중에 일부는 패할 수가 있다.
고구려가 패하였다면 요동군에 있던 3개 현을 현도군으로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사략에 6개 성이 기록되어 있는데,
백암(白岩), 장령(長岺), 토성(菟城), 문성(汶城), 장무(章武), 둔유(屯有)이다.
105년 고구려의 공격의 주 대상은 요동군일 것이다.
백암, 장령, 토성은 요양 인근일 것이며, 문성은 요동군에 속한 현이다.
그런데 둔유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105년 고구려는 문성까지 공격한 후
인근에 있던 낙랑군 둔유현을 점령한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요동군에 속한 현은 다음과 같다.
한서지리지 요동군(18현) :
양평, 신창, 무려, 망평, 방, 후성, 요대, 요양, 험독, 거취, 고현, 안시, 무차, 평곽, 서안평, 문, 번한, 답씨
요양이 보이는데 현재의 요양이라면
먼저 요동군이 요양 인근에 위치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의하면 위만조선과 북부여 간에 영토 분쟁이 심했는데,
해성시를 위만조선이 점령해서 탈환하는 내용이 있다.
요하를 경계로 위만조선과 북부여 간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멸망한 후
한나라가 요하를 건넜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의하면 고두막한의 등장이
한나라 군에 대처를 못했기 때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부여 세력이 약화되어 의병인 고두막한에 의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요양에의 요동군 설치는 인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요동군의 남쪽에 있는 현을 파악해 보자.
요동군 18현 중 요양, 요대, 무려, 후성, 망평, 양평, 거취, 무차는 남쪽이 아니다.
신창, 방, 험독, 고현, 안시, 평곽, 문, 번한, 답씨는
한서지리지 만으로 판단이 안된다.
고현은 이름에서 높은 곳에 있는 현으로 보이며
이는 요양이나 안산 동쪽 산악 지형에 있는 현일 것이다.
험독은 단군 왕검이 있던 성이라 하므로 해성시가 유력하다.
해성시가 일시 평양(수도)으로 불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삼사기 태조왕 69년
고구려가 요대현을 공격했는데 요동태수 채풍이 신창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따라서 신창도 요양 인근으로 파악된다.
수경주에 의하면 방현은 안시현 위에 있다.
안시, 평곽, 문, 번한, 답씨는 전혀 파악이 안된다.
그런데 한서지리지에서 평곽현은 염관과 철관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소금과 철이 생산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평곽현은 대석교시로 파악된다.
고구려사략에 의하면 115년 10개의 성을 쌓았는데,
평곽과 둔유가 보인다.
105년 문성과 평곽 둔유를 고구려가 점령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태조왕 94년(146년) 8월 다음 기록이 있다.
<요동 서안평현을 습격해서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의
순제와 환제 기간에 요동을 공격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鄉)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았다는 기록과 같다.
이 사건은 고구려사략에 더 소상하게 전하는데,
141년 4월 대방(帶方)의 장언이 둔유를 침입하니 토성태수 을어가 격살하였고,
낙랑태수 용준이 서안평을 침략하자 서안평태수 상잠이 격퇴하고 신안, 거향까지 추적하여
그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46년엔 대방이 반란하여 을어가 대방태수 유호를 참살하였다라고 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는데
한나라 점령한 지역의 관직명은 고구려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미 백성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므로 굳이 바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수”라는 직위를 쓴다 하여 무조건 한나라로 생각하면 안된다.
신안과 거향의 위치는 어디일까,
낙랑군이나 요동군도 아닌데?
삼국지는
고구려가 신안, 거향을 공격하고 다시 서안평을 공격해서
도중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데리고 돌아갔다고 하고 있다.
공격로가 신안, 거향과 대방 → 서안평 둘이다.
서안평 공격로에 대방이 있어?
그리고 낙랑태수의 부인과 아들이 왜 서안평에 있을까?
삼국지의 이런 불합리한 공격로 보다는 고구려사략이 더 타당해 보인다.
대방령을 죽인 사건과
서안평 공격 및 낙랑태수 처자 생포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다.
그리고 서안평을 공격한 주체는 한나라가 맞으며
서안평은 122년 고구려가 이미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146년 기록은
141년 기록과 146년 기록을 착오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41년 대방이 둔유를 침공하였다는 것이다.
105년, 141년(146년) 기록에 의하면
둔유현은 요동군과 가까우며, 대방과 둔유는 가깝다.
평양 무덤에서 발견된,
기원전 45년 낙랑군 호구부에 의하면
대방의 호수는 4,346호, 둔유의 호수는 4,826호이다.
조선현(9,678호)을 제외하면 둔유와 대방이 2위와 3위이다.
대방은 한서지리지에서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가다가
대방에 도달해서 바다로 들어간다(帶水西至帶方入海)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사략에 120년
요광이 문성에 있으면서 태수를 칭하고
토성, 평곽, 둔유를 침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정리하면,
평곽현이 대석교시이고,
문성에서 평곽, 둔유, 토성(요양)를 공격할 수 있고
대방이 둔유를 공격하는 거리이며,
둔유와 대방은 낙랑군에 속하며,
둔유현 이남 황무지가 대방군으로 설치되었다면
둔유현은 대석교시 아래 개주시일 수밖에 없다.
대방 역시 개주시로 파악된다.

문현(성)과 평곽현은 모용씨와 관련
군사적 요충지로 등장하지만
둔유현은 이후 보이지 않는데,
대방과 사실상 병합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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