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문

포상8국의 공격 대상

무극신 2021. 6. 7. 04:34

이번에 볼 논문은 포상8국에 관한 것이다.

 

제목: 포상팔국 전쟁의 개전 시기와 전쟁 양상의 재검토

저자: 정상희

출처: 역사와 현실 110(2018.12.)

 

 

1. 사전 지식

 

포상8국 사건은 포상8국이 가라(혹 아라)를 공격하자 가야(또는 아라)가 신라에 구원 요청하여 신라가 구원한 사건이다.

 

 1) 포상8

 

포상8국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보라국, 사물국, 고자(고사포), 골포국, 칠포국 5개 국가만 나온다.

사물국은 사천, 골포국 창원 합포, 칠포국은 칠원면, 고자국은 고성으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보라국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보라는 발라로 의심되며 나주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주설과 섬진강 포구 설 등으로 크게 대립하고 있다.

 

나머지 3국은 놀랍게도 남당 박창화의 사료(고구려사략- 산상대제기)에 나온다.

 

가리국, 성산국, 초팔국이다. 가리국(加利國)은 상주시, 성산국은 성주에 비정되며 초팔국은 합천에 비정된다.

 

 2) 사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나해이사금 14년에 포상8국이 가라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이 태자인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 병사를 거느리며 구원하게 하여 8국의 장수를 죽이고 포로 6천명을 탈환하였다라고 기록되었으며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 편에서 포상8국이 아라국을 징벌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요청하여 왕손인 날음으로 하여금 근처의 군과 육부의 병사로 구원하였고, 3년 후 골포, 칠포, 고사포 3국이 갈화성을 공격하자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삼국을 물리쳤는데, 물계자의 공이 가장 컸으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공을 얻지 못하였다는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물계자 내용과 거의 같은데, 나해왕 178국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여 태자 내음, 장군 일벌에게 명하여 물리쳤다는 것과 나해왕 203국이 신라의 갈화를 공격하자 왕이 막아 이겼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합하여 보면 전쟁은 나해이사금 14, 17, 203번 있었다. 물계자는 이 중 17년과 20년 전쟁에 출전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는 전쟁의 경과를 잘 알 수 없다.

박창화의 사료 나해이사금기와 고구려사략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나해이사금 14년 포상8국이 가야를 공격하였고 가야 태자 우고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여 8국 장수를 죽이고 가야를 구원하였고 나해이사금 17년 가야 태자 우고가 인질이 되고 복수를 요청하자 이번에는 신라가 포상8국을 공격하여 항복시킨다 나해이사금 20년 골포, 칠포, 고사포 3국이 갈화성을 공격하자 신라왕이 친정하여 패퇴시킨다. 가야 왕자는 본국으로 귀환한다.

 

 

3)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

 

마한 기록 중 다음 문구가 있다.

 

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 신지는 우대하여 부르기도 하는데 신운은 견지보, 안야는 축지, 분신리는 아불례, 구야는 진지렴의 호를 더한다. 관에는 위솔군,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 있다.

 

변진 12

 

변진구야국, 변진안야국, 변진반로국, 변진미오야마국, 변진고야미동국, 변진고순시국...

 

 

 4)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과 연대 조정

 

학계는 일본의 영향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한다고 전 게시물에서 말했는데,

포상8국 전쟁도 3세기가 아닌 4세기 ~ 7세기까지 연대를 조정하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 개전 시기를 분석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일본서기와 달리 정확한 자료에 의해 기술되었다

자기 입맛대로 연대를 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삼국사기 기록을 신뢰하고 이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지 본인 지식과 다르다고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된다.

 

 

2. 논문의 주장과 비판

 

 1) 기년을 조정하지 않고 전승 그대로 이해해도 당시 상황과 괴리되지 않는다

 

삼국지 한전을 볼 때 구야국과 안야국이 양대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함을 볼 때 포상8국과 가라(또는 안라)의 대립과 유사하다. 따라서 기년을 조정하지 않아도 당시 상황과 괴리되지 않는다.

4세기 전반설은 낙랑 대방군의 소멸로 전기 가야 연맹의 동요로 구야국의 세력에 대한 포상8국의 도전으로 본다.

정상희는 이 경우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대성동 고분군에 의하면 김해 지역이 4 ~ 5세기까지 인근 지역에 비해 선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 정상희 의견은 옳다.

 

자기 논리에 맞춰 기년을 바꾸는 것은 학계에서 빨리 없어져야 할 악습이다.

이해가 안되면 더 연구하면 될 일을 기록 자체의 시간을 조정해 버리는 것이 정당한가?

삼국사기에도 맞지 않는 기록이 있다.

나해이사금 14년 태자 우로에게 군을 이끌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석우로는 230년 감문국을 정벌하는데 209년 이때 태자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창화의 사료를 보면 나해이사금 14년 태자는 우로가 아닌 가야 왕자 우고이며 삼국사기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긴 것이다. 우로는 나해이사금 213월 출생하였다.

 

 

 2) 공격 대상국은 아라이며 구야의 세력 확대로 아라와 대립하였고 구야와 대립하던 신라에 원조를 요청한 것이다.

 

  비판) 포상8국의 공격 대상은 아라도 김해 구야도 아닌 대가야이다

 

포상8국의 전쟁은 세력 다툼이며 당시 가장 강대국인 대가야를 공격한 것이다.

가야는 대가야와 금관가야로 나뉘게 되며 대가야는 형 뇌질주일이 금관가야는 동생 뇌질청예가 다스렸다.

지난 게시물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창녕 비지국을 이어 받아 뇌질주일이 대가야를 만들게 된다.

이후 대가야가 가야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데, 포상8국은 대가야를 공격하여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박창화의 나해이사금 사료를 보면 나해이사금 115월 백제와 포상8국이 모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전쟁 중이었다. 백제는 가야에 연수를 제의했는데 가야가 거절하자, 백제는 포상8국의 야망을 부추겨 대가야를 공격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포상8국 중 보라국이 있다. 보라국은 나주에 있다.

나주에서 담양, 남원을 거쳐 고령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서 가장 먼저 기술된 보라국이 오히려 포상8국의 주체로 보인다.

김해 구야국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가야와 입장을 같이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야가 대가야와 김해 구야국으로 크게 양분되었다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안야와 구야로 양분된 것과 맞지 않는다.

우리는 안야 = 안라로 생각해서 안라를 함안 아라가야로 보고 있으나 이는 후대의 일이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안야는 대가야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3세기에 안야와 구야의 세력이 강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과 대가야와 금관가야로 세력이 크게 양분되는 국내 기록이 일치한다면 안야 = 대가야라고 해석해야 타당할 것이다.

즉 변진 12국 중 안야는 대가야이며 미오야마는 고령이 아닌 다른 곳이라고 판단된다. 미오야마국을 창원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반로국이 고령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합천 야로면이란 설도 있다.

삼국사기 물계자 열전에서 아라국으로 표현된 것은 원 기록에 안야로 되어 있고 후대 전승되다가 아라로 변경된 것은 아닐까 판단된다.

 

 

3. 정리

 

 ① 포상8국의 공격 대상은 대가야이며 패권 다툼이 그 원인이다.

 ② 백제가 대가야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정세적 목적이 그 배경이 되었다.

 ③ 포상8국은 보라(나주), 가리(성주), 성산(성주), 초팔(합천), 사물(사천), 골포(창원), 고자(고성), 칠포(칠원읍)이며 나해이사금 14(209) ~ 20년까지 포상8vs 대가야, 신라의 전쟁이었다.

 ④ 삼한 신지 중에서 더 우대를 받은 4국 중 안야는 함안이 아닌 대가야를 지칭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