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계의 주장
우리 학계는 두만강 유역으로 북옥저를, 함흥에 남옥저을 비정하며,
중국 학계는 수분하 유역의 단결- 크로우노프카문화를 북옥저로 두만강유역을 남옥저로 비정하며, 함흥은 옥저에서 제외한다.
북옥저 정벌은 주몽 10년의 일인데,
주몽 2년 비류국, 6년 행인국, 10년 북옥저 정벌의 시간 순이다.
학계에 의하면
고구려의 북옥저 정벌은 환인에서 백두산 동남을 거쳐 두만강 유역으로
즉 서에서 동으로 정복 활동이 전개된다.
또 대무신왕 9년 다시 개마고원에 있던 개마국, 구다국 점령과
태조왕 4년 함흥에 있던 동옥저를 정벌하게 된다.
학계의 주장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은
서에서 동으로 가고 다시 남으로 가는 방향이다.
그런데 태조왕 53년부터 요동 정벌이 시작된다.
남으로 내려가는 것을 함흥에서 멈추고 요동 정벌에 나선다?
왜 평양을 공격하지 않고?
기왕 함흥을 공격했다면 서진에서 평양을 점령하여 후방의 위험을 없앤 후
요동을 공격하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평양이 대세에 영향이 없고 백제와 완충 지대를 두기로 하였다면
평양을 놔두고 요동을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태조왕은 요동을 완전 점령하였음에도 평양은 공격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리왕 때 선비 공격이나 모본왕 때의 한나라 태원 공격은
고구려 정복 활동과 방향이 다르다.
이는 학계의 주장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의미한다.
본 블로그는 북옥저 이전까지
둔화시(졸본) → 길림(비류국) → 장춘(황룡국) → 송원(행인국)으로
주몽의 정복 활동이 전개되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따라서 북옥저 정벌은 송원 위 즉 송화강 위쪽이 된다.
본 블로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리왕 11년의 선비 공격, 모본왕의 태원 공격이 이해가 된다.
주몽 유리왕 때는 서에서 동으로
대무신왕 때는 동쪽으로 정복활동이 전개되며
태조왕 때 요동 정벌이 시작된 것이다.
함흥까지 군사 활동이 전개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2. 북옥저의 위치
옥저란 기름진 땅을 말하니 북옥저는 송화강 위의 지역을 말한다.
주몽은 왜 북옥저를 정벌하였을까?
이에 대해선 추모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몽 동명 10년(기원전 28년) 선비왕 건짐이 사신을 보내서 주몽에게 말하길
「말갈은 물줄기를 따라 옮겨 다니는데 멀리 상곡의 북쪽에서 태백까지 이르렀고 흑수를 잠식하여 동은 바다에서 서로 북해까지 이르렀습니다」
라면서 숙신은 말갈과 전쟁과 화친을 번갈아 가면서 100년을 했으나 포기하였고 말갈을 잡초에 비유하면서 잡초와 싸워 이득 보다는 손해가 많을 것이라 하면서 전쟁을 포기하라고 종용하였다.
숙신에 따르면 북옥저에 있었던 사람들은 말갈로서
흑룡강을 따라 동해에서 바이칼호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였다.
말갈은 북부여 국력이 약화되자 송화강을 남하하여
북부여 나라들을 파괴하였으며 순노와 남옥저가 피해를 많이 입었다.
주몽은 말갈을 평정하여 고구려의 피해를 원천봉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추모경에 의하면 당시 주몽이 동원한 군대는
3로 60군으로 1군은 2천명이니 12만명이고 향도로 동원한 말갈인도 3만명이 되었다.
총 15만의 대병력으로 말갈을 아예 뿌리 뽑고자 한 것이다.
전과는 땅은 천여리, 포로가 8만이고 가축 17만두, 말 5천필 등이고
특이한 것은 말갈인들은 중국 옛 나라들의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동해에서 바이칼호까지 원정하였을까?
추모경에서 주몽이 원정 전에
백웅에서 숙신 경계까지 북옥저를 조사하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백웅은 추모경에 기원전 44년 백웅이 동부여에게 반란하여
주몽과 부분노가 평정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백웅은 동부여 땅으로
하바로프스크 위에 있는 Reka Tunguska강 유역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백웅은 동부여 땅이므로 주몽이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얼빈시에서 훌란강(Hulan river)을 따라 북상하면서
흑하시까지 공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옥저 땅에 12명의 장군을 두어 항복한 말갈인들을 다스렸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북옥저를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 한다는 것은
북옥저에 있었던 고구려군의 치소를 말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구루란 성을 뜻하므로 치구루란 성을 둔 곳이란 의미로
북쪽의 기름진 땅이란 북옥저의 의미와 전혀 같지 않다.
북옥저의 별명이라기 보다 고구려가 성을 둔 곳이란 뜻으로 사용된 말이
위나라 군대가 북옥저의 별명으로 착오한 것이다.
위나라 군대가 북옥저까지 같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동천왕이 북옥저까지 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남옥저에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으므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은 오류로 보인다.
진서에서는 군 일부가 숙신을 거쳐 동해까지 같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진실일 것이다.
자세한 것은 조위와 고구려 전쟁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남옥저는 북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는데
풍속이 같다고 하였다.
남옥저는 북옥저에 있었던 말갈이 남하하여 남옥저에서 살게 된 것이고
따라서 남옥저인과 북옥저인은 말갈인이다.
그렇다면 옥저는 말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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