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계의 주장
학계는 남옥저와 동옥저가 위치가 같다고 본다.
그것에 대한 근거는 없으나 북옥저의 위치를 두만강으로 비정하기에
북옥저에서 800리 떨어진 남옥저를
함흥인 동옥저에 위치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는 하나의 실체에 왜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해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2. 새로운 죽령
남옥저 기록은 동천왕 때의 고구려 ∙ 조위 국제 전쟁에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투에서 패한 동천왕은 수세에 밀려
죽령(竹嶺)을 거쳐 남옥저에 도달하였고,
밀우의 계략으로 역전의 기회를 잡는다.
여기 죽령은 신라가 개척한 죽령과 다르다.
학계에 의하면 남옥저와 동옥저가 같으므로
동천왕은 함흥까지 왔다는 뜻이 된다.
동천왕이 함흥으로 도피하는 것은 상당히 무모하다.
학계에 의하면 평양에 낙랑군이 있으므로
포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3. 남옥저의 위치
위에서 죽령이 남옥저를 찾는 키임을 알 수 있다.
죽령 기록은 추모경에서 보인다.
동명 9년(기원전 29년) 낙랑과 국경을 정하는데,
죽령 동쪽은 낙랑으로,
죽령 서쪽인 엄리수 동쪽과 남쪽은 순노의 땅으로 하였다.
주몽 때 죽령 → 낙랑이
동천왕 때 죽령 → 남옥저가 된 셈이다.
남옥저와 낙랑은 관계가 있을까?
놀랍게도 추모경에서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추모경에 의하면
기원전 39년 주몽이 말갈을 대파하고
낙랑과 경계를 정하는데,
낙랑왕 시길이 엄수 동쪽과 개사수 땅을 갖고 싶어서
낙랑은 본시 남옥저이므로
남옥저 옛 땅을 갖고 싶다고 한 것이다.
낙랑은 남옥저에서 유래했으며 같은 실체란 것이다.
엄수(奄水)는 졸본의 위치를 파악할 때 보았듯이
무링강이며, 무링강 동쪽의 땅을 낙랑이 요구한 것이다.
일단 이 땅을 낙랑에게 주었다가
이듬해 기원전 38년 8월 낙랑이 졸본을 공격하자
주몽이 대파하고 이 땅을 졸본 땅으로 귀속시켰다가
기원전 29년
낙랑 동쪽은 낙랑, 서쪽은 순노로
정식으로 국경을 정한 것이다,
무링강 동쪽과 남쪽이 남옥저의 옛 땅이므로
죽령은 수분하시로 판단된다.
따라서 남옥저는 흥개호 남쪽 광활한 농경지가 될 것이며
중심지는 우수리스크가 된다.
한편 추모경에
기원전 48년 말갈이 남하하여 개사수(盖斯水)에서 남옥저를 자칭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이 문구만 보면 남옥저는 기원전 48년에 설립되었다고 오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졸본왕 연타발이 재사에게
「말갈이 남침하여 남옥저와 순노 지방이 어육이 되었다」
고 한 말과
기원전 54년 건국한 낙랑은 남옥저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에서
남옥저는 기원전 48년 이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단결 – 크로우노프카 문화
남옥저로 비정한 우수리스크는
고고학에서 "단결 - 크로우노프카 문화"로 부른다.
세형동검이 발견되며 기원전 4세기까지 소급된다.
중국과 러시아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 문화라 한다.
단 중국은 북옥저로 비정하고 있으며
함흥은 옥저 지역에서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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