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문

(서)옥저의 위치

무극신 2023. 7. 2. 21:41

 

1. 의문의 시작

 

옥저란 농사짓기 좋은 땅이란 의미이고,

북옥저, 남옥저, 동옥저가 있었다면 서옥저도 있지 않을까?

 

남과 북이 짝을 이루고

북옥저가 송화강 위, 남옥저가 흥개호 수분하 유역이며,

 

동과 서가 짝을 이루고

동옥저가 두만강 등이라면

서옥저가 있다면 요하 인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서옥저가 요하 인근이라면

동옥저는 서옥저 사람들이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서옥저의 존재 여부를 알기 위해선

옥저의 연원을 조사하여야 한다.

 

옥저가 등장하는 최초 시점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

옥저도 위만에 속했다고 한다.

 

다음엔

 

()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할 때

옥저는 현도군이 되었으며,

후에 이맥의 침범으로 현도군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으며,

지금 말하는 현도의 옛 부가 이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

 

삼국지에서 지금이란 고구려 동천왕 이후를 말한다.

현도군은 당초 옥저에 설치되었으며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현도군이 구려 인근에 다시 설치된(3현도군) 이전 현도군(2현도군)

현도고부라 한 것이다.

 

여기서 당초 옥저에 설치된 현도군을 제1현도군이라 한다.

 

문맥 상 옥저에 설치된 현도군과 구려 서북의 현도군은 같다는 의미가 된다.

1현도군과 제2현도군의 실체는 같고 연속적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옮겼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학계에서 제1현도군, 2현도군으로 나누지만

그 실체는 같고 제3현도군과는 다르다는 뜻이 된다.

 

옥저는 다시 낙랑으로 돌아와 속했다(沃沮還屬樂浪).

 

이맥에 침입을 받았던 옥저는 다시 한나라가 차지했고

이제 낙랑군에 속했다는 의미이다.

 

토지가 넓고 멀고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에 있어

동부도위를 설치 불내성(不耐城)에서 다스리며

동쪽 7현을 별도로 거느린다. 이때 옥저가 모두 현이 되었다.

 

여기서 옥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는데

단단대령 동쪽에 있다는 것이다.

단단대령의 의미는 한자 그대로

홀로 있는 큰 고개란 뜻이다.

 

 

2. 학계의 주장

 

서옥저에 대한 의문이 있을 법도 한데,

학계는 서옥저를 다룬 글이 전혀 없다.

 

학계는 조선 수도가 평양이고 낙랑군 치소이며,

단단대령은 여러 설이 있지만

평양과 함흥을 나누는 산맥이라 한다.

 

옥저는 함흥 지역이며 동부도위가 설치된 곳이라 주장한다.

 

학계의 제1현도군과 제2현도군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학계의 제1현도군과 제2현도군 위치

 

누가 봐도 함흥에서 신빈현까지 이동하는 것은 무리이다.

옮긴다는 표현 보다는 함흥에 설치된 현도군을 폐쇄하고

고구려 서북인 신빈현에 다시 설치했다고 표현해야 마땅하다.

 

단단대령은 홀로 서 있는 고개를 뜻하는데

평양과 함흥 사이 산맥을 홀로 선 고개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학계가 옥저를 함흥지역에 위치시키다 보니

옥저 = 동옥저가 된다.

그리고 동옥저 = 남옥저이며

북옥저까지 포괄하여 동옥저라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학계가 옥저를 함흥 외 다른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평양이 기준과 위만의 수도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평양이 위만의 수도라고 하면

답을 하기 어려운 여러 문제가 잇다르게 된다.

 

기준 세력이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며,

위만과 기준 세력과는 원수지간이다.

 

그런데 위만조선과 남하한 기준 세력과 전쟁 기록은 없다.

기록되지 않을 수 있지만,

무수한 전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전쟁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원수지간이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전쟁이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의문은,

 

위만은 난민이다.

난민이 아무리 많아도 원주민에 비하여 수가 적다.

 

위만은 쿠테타로 조선 수도를 차지한다.

그런데 반란 와중에 기준은 죽지 않았다.

 

평양이 기준의 수도라면 배로 평양을 탈출해서

황해도 지역에 상륙한 다음 기준이 살아 있음을

기준 군대에 알린다면

위만은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된다.

 

물론 다른 사정이 개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하튼 국토가 좁은 땅에서

위만 세력과 기준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충돌이 없었다?

 

이것은 두 세력 간 위치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3. ()옥저의 위치

 

옥저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중국 자료가 있다.

 

요사지리지 동경도에

해주 남해군은 본래 옥저국 땅이며 고구려 때 사비성이었으며

발해 땐 남경 남해부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비성(비사성)을 학계에선 대련시에 있다고 하나

근거가 없다.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사비성이 함락되는데

이후 압록강에서 대기한다.

 

압록강은 현재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를 말한다.

 

따라서 사비성은 요하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리고 남해라고 하였으므로 바다와 가까운 곳이다.

 

정리하면 요하와 바다와 가깝고 단단대령의 동쪽에 옥저가 있다.

 

한편 남해와 관련하여 고구려 태조왕의 남해 순시 기록이 있다.

 

고구려 태조왕 628월 태조왕이 남해를 순시했다.

학계는 남해를 함흥지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옥저 정벌은 태조왕 4년으로 함흥을 위무하기 위한 순시로 보기 어렵다.

 

태조왕 62년과 가까운 연대를 찾아야 한다.

53년 이후 요동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남해 순시는 새로 얻은 땅인 요양, 대석교시 등을 방문한 것이다.

고구려는 발해만을 남해라 불렀으며 이는 발해, 요까지 이어진 것이다.

 

태조왕 666월 한나라 현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화려는 옥저에 속한 현이다.

 

동부도위가 다스린 7현은 불내(불이), 잠태, 화려, 사두매, 전막, 부조, 동이이다.

 

추모경에서 양맥국에 사두부가 있었다. 옥저 사두매와 이름이 유사하다.

 

화려, 사두매는 현토와 가까운 곳으로 구려와 가까운 곳으로 판단된다.

 

 

옥저를 정리해 보면

 

옥저에 화려, 사두매가 있는데 구려와 가까운 곳에 있다.

구려는 유하 유역에 있다.

옥저 불이는 고구려 사비성(비사성)이며 요하와 가까운 곳에 있다.

옥저는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다.

남해라 불린 발해만과 가깝다.

 

자료를 종합하면,

 

반금시 반산현이 옥저 불이현으로 판단된다.

단단대령은 의무려산이다.

 

옥저에 설치된 제1현도군은 기원전 75년 구려 서북으로 옮겼으며

106년 제3현도군 설치 이전까지 있던 곳으로 현도고부라 한다.

(서)옥저의 위치

 

한편,

 

요사지리지에서 옥저에 칭호를 붙였다.

불이(불내)는 나라 수도에 붙이는 이름이다.

옥저에 불이가 있으니 대군장이 있음을 뜻한다.

 

삼국지에서는 동옥저에 군장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 옥저에는 군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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