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 제기
진국(辰國)이 후한서,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어,
한강 이북은 고조선 한강 이남은 진국이 통치하였다 함이 학계의 통설이다.
학설과 달리 우리 사서는 진국에 대해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삼국사기는 삼국 이전 역사는 다루지 않으므로 진국을 기술하지 않고,
삼국유사에선 위만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전한서를 인용해서 진국이 보이지만
진국은 진한이라는 안사고 말이 인용되어 진한으로 보고 있는 듯하며 별도 표제로 하여 깊게 다루고 있지 않다.
학계에서 위서라고 하는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등 조차 진국은 나오지 않는다.
일단 중국 기록을 살펴 보고 학계의 주장에 대해 검토해 보자.
2. 중국 기록
가. 후한서 동이열전
① 한(韓)은 세 종류가 있는데 1은 마한, 2는 진한, 3은 변진이다.
②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이 있으며 북은 낙랑과 남은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국이 있으며 북으로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12국이 있으며 남으로 왜와 접한다.
③ 범 78국이며 백제(伯濟)가 그중 한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이며 작은 나라는 수천가이다. 각기 바다와 산 사이에 있다. 땅은 합해서 사방 4천여리이다. 동서는 바다로 한계가 되며 모두 옛 진국이다(皆古之辰國也).
④ 마한이 가장 큰 데, 마한 사람 중에서 진왕(辰王)을 함께 세운다. 목지국(目支國)에 수도를 두며, 삼한의 땅의 왕이 된다.
⑤ 진한은 노인들이 말하길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⑥ (한나라) 초기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파하게 되어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파한 다음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으며, 준의 후손이 끊기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
⑦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서는 바다로 한계가 되며, 남은 왜와 접한다. 사방 4천리이다. 3종이 있는데 1은 마한, 2는 진한, 3은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⑧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 무릇 50여국으로 큰나라는 만여가고 소국은 수천가로 총 십여만호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
⑨ 제후 준이 왕을 참칭하였는데,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좌우 궁인들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그 후예가 끊겼는데 지금 한인(韓人) 중에 그 제사를 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낙랑군에 속하여 사시 조알한다(위략(魏略)에서 말하길 우거가 망하지 않았을 때,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曆谿卿)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쓰지 않자 동쪽에 있는 진국으로 갔다(東之辰國). 이때 따라간 백성이 2천여호였다.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與朝鮮貢蕃不相往來).
⑩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고, 노인들이 대대로 내려온 말을 전하길 진나라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망명하였는데 마한이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마한과 언어가 같지 않다. 말하길 낙랑인은 (진한인의) 남은 사람들이라 한다. 지금 진한(秦韓)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
⑪ 변∙진한 합하여 24국으로 대국은 4천 ~ 5천가 소국은 6백 ~ 7백가이다. 총 4 ~ 5만호이다. 그 12국은 진왕에 속한다(其十二國屬辰王). 진왕은 항상 마한인으로 삼았으며(辰王常用馬韓人作之), 대대로 계속 되어(世世相繼), 진왕은 부득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 못한다(辰王不得自立爲王). (위략에서 말하길 명백히 흘러 옮겨온 사람들이기에 고로 마한의 제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⑫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며, 성곽이 있고 의복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 법속이 서로 유사하나 제사는 다름이 있다. 독로국은 왜와 접한다. 12국에 역시 왕이 있다(十二國亦有王).
다. 한서 조선전
⑬ 진번과 진국이 글을 올리고 천자를 뵙고자 하였지만 (위만이) 길을 막아 통하지 않았다(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3. 학계의 주장과 비판
1) 진한은 진국이 이동한 것이란 이동설
진국은 한반도 중부에 있던 나라로 외부인이 오자 영남 지방으로 이동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진국이 한반도 중부에 있었다는 통설과 진한은 옛 진국이라는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조화한 것이다.
그러나 진한은 마한이 동쪽 땅을 할양한 것이란 기록과 전면 배치되며,
상식적으로 조상 무덤이 있는 땅을 외부인에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을까?
외부 집단이 철기를 사용하였더라도 위력 면에서 청동기와 철기 차이는 크지 않다.
진국 이동설은 기록과 맞지 않는 점에서 타당하지 못하다.
2) 한반도 중부 지역이 진국이라는 통설
한반도 중부 지역이 진국의 영역이라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그런데 후한서에 의하면 기준이 한을 공격한 후 한왕이라고 자칭하였고,
진한은 진나라 부역을 피해서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 땅을 할애하였다 하였으니
기원전 3세기에도 마한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국이 존재할 시간적 배경이 모호하다.
고조선은 연나라와 전쟁을 하였다.
학계에 따르면 평양에 있던 고조선이 연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경기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국과 전쟁 없이 지낸다?
이것은 상식과 너무 맞지 않다.
진국이 경기 인근에 있었다면 평양의 조선과 전쟁을 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역사서에 그 흔적이 남아야 한다.
평양 고조선, 중부 지방 진국이라는 학계 통설은 근본부터 재고해야 한다.
3) 진(辰)이 동쪽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단순 동쪽 나라란 의미라는 관념설
진국이 사서에 실질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상 역계경이 진국으로 간 단 하나의 사건만 있고,
진(辰)이 동쪽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동쪽 나라라는 관용적인 표현이라는 학설이다.
그러나 후한서의 모두 옛 진국이라는 표현이나 삼국지에서 진한은 옛 진국이라는 표현은
실질적인 국가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어 단순히 동쪽 나라라는 관용어라고 보기는 무리이다.
4. 진국은 삼한의 별칭이다.
후한서에서 기준이 마한을 공격해서 자립하여 한왕이 되었는데 후예가 끊기자 마한인이 자립해서 다시 진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한왕(韓王) = 진왕(辰王)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사서에서 처음 진국이 등장하는 위만조선 시기는 이미 삼한이 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당시 진국이 별도 있던 게 아니라 삼한이 바로 진국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에서 “지금”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데,
지금이란 삼국지가 기록된 3세기 중기를 말한다.
청주한씨족보에서 기준이 마한을 세운 때는 기원전 194년이고,
환단고기에서 한탁이 마한을 세운 때는 기원전 193년으로
삼국지, 후한서 등 한(韓) 기록은 무려 5백년의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다.
5백년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인가?
따라서 삼국지 등에서 한 기록을 볼 땐 시간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외국인은 아무래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역동적 모습이 삼국지 등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외국인의 기록이란 한계 때문이다.
삼한 중 마한이 대표 국가이면 진왕이 아니라 마왕이 되어야 하지 않나?
이런 의문을 중국인도 가졌을 것이고 삼한의 연원이 진국임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삼한은 모두 옛 진국이란 단순한 기술로 후대에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중국 역사가는 삼한 구성이 국가 체제란 것과 상세한 운영 등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는 색불루 단군 조선이 진국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국 용어가 삼한 체계에서 연유한 것임을 태백일사 구성을 통해 설명한다.
진국은 진조선의 약칭이고 나라를 삼등분하는 삼한 원리에 따라 운영하였다.
한탁이 재건한 마한도 삼한 원리에 따라 국가 체제를 구성하였고,
전과 달라진 점은 진한이 아닌 마한이 진국으로 삼한을 대표한 것이다.
마한 왕이 마왕이 아닌 진왕이 된 이유이다.
학계는 기준을 조선왕으로 인정하면서 기준의 성씨 기씨이고 기자의 후예임은 논하지 않는다.
기씨이므로 당연히 기자조선 또는 기씨조선이라 해야 맞다.
동 시간대에 기씨조선이 있고, 기준이 공격한 마한이 있다. 그리고 북부여가 있다.
세 나라가 전혀 교통없이 각각 별개로 운영되었을까?
5. 결론
진국은 한반도 중부에 있던 국가가 아니라 삼한을 말한다.
아래에서는 중국 기록과 관련된 세세한 것들을 정리해 본다.
a) 한서의 “진번진국” 기록(위 ⑬)은 사마천 사기에선 “진번 주변 여러나라眞番旁衆國)”으로 표현되어 있다. 당시 정황 상 사기 기록이 더 타당하다. 진번 진국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진번이 위만조선에 종속된 사정 등을 볼 때 사기 표현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b) 목지국이 맞나 월지국이 맞나?
목(目), 월(月) 한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필사 과정에서 오기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데 학계 다수설은 목지국을 선택한다.
목지국, 월지국은 우리나라 이름을 한역한 것으로 우리나라 이름으로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지(支)는 님에 해당하는 높임말로 목지국은 눈님의 나라, 월지국은 달님의 나라란 뜻이다.
눈님의 나라 보단 달님의 나라가 당시 사람들의 관념 세계와 맞을 것이다.
왜 해님의 나라 즉 일(日)지국이라 하지 않았을까?
해님의 나라인 부여가 있기 때문이다. 부여는 해님의 나라인 조선을 이은 나라이다.
삼한 체제에서 해님, 달님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변한은 어떤 천체에 빗대었을까?
c) 위 ⑪번의 진왕은 “진(한)왕”의 생략으로 보는 학계 다수설이 타당하다. 진한은 마한인을 진한왕으로 임명하여 진한을 견제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라가 독자적으로 박혁거세를 왕으로 세울 때까지이다. 박혁거세 이후는 신라왕이 진한왕이 되었다.
후한서는 진왕이 삼한의 총왕이고 삼국지는 삼한 모두 각기 왕이 나와 어떤 사서를 취할 것인지 학설의 대립이 있으나, 오백년이란 시간과 삼한 체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d) 위 ⑥번 준왕 후대가 끊기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란 이 사실은 백제일까 아니면 한탁일까? 청주한씨족보는 기준의 태자인 한탁이 마한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탁은 한씨이니 한탁을 마한 시조로 본 환단고기가 타당하다고 생각되고 다시 자립한 진왕은 한탁의 일을 말한 것으로 본다.
기준이 공격한 마한을 익산으로 보는 게 조선 실학자의 견해이고 현재 학계도 긍정하는 소수설이 있으나, 이는 변한을 익산으로 봉한 것을 오해한 것이며 평양을 기준의 수도로 본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기준이 공격한 마한은 익산이 아닌 평양으로 평양이 당시 마한의 수도였다. 기준이 평양으로 간 것은 낙랑에서 온 최씨의 도움을 받기 위함일 것이다. 기준은 한왕이 되어 위만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내분으로 기준이 죽고 휘하 장군인 한탁이 남하하여 한반도 중부에 마한을 재건하고 익산에 변한을 경주에 진한을 분봉하여 다시 삼한을 재건하였다.
e) 위 ⑨번 조선상 역계경이 간 진국은 어디일까?
역계경은 이름이 아니라 계라는 지명에 역대로 경으로 책봉된 자로 중앙에 올라가 조선상의 지위에 오른 자이다. 2천여호 약 만 명을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위만조선 수도가 조양이고 위만조선에 조공하는 나라와 상종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고구려 마한 기록에서 본 바 있는 요동반도 인근으로 생각된다.
f) 위 ⑫ 번, 위 ⑪번에서 변진은 진한에 속하지 않고 따로 왕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는 가야를 말함이다. 가야가 진한인 신라에 종속되지 않음을 기록한 것으로 변한은 박혁거세 때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새롭게 가야가 등장하여 다시 삼한 체제가 됨을 의미한다. 진한 체계를 거부하고 별도 체계를 구축하려는 가야와 진한 체계에 포함시키려는 신라 사이에서 갈등을 엿볼 수 있고 삼국사기 초기에 기록된 신라와 가야 전쟁의 근본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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