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삼한?과 삼한이동설 개념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보면 「중마한」이란 용어가 있다.
마한 시대를 3시기로 나눈 것으로
한탁 이전을 상마한, 한탁의 마한을 중마한이라 하여 시대구분한 것이다.
환단고기엔 하마한의 시기가 언제인지 정의하지 않았지만,
최치원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에 대비했다는 것에서
삼국 시대를 하마한 시대로 본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삼국을 삼한에 빗대면 가야가 빠지게 되고,
가야 멸망 이후를 하마한이라 하면 너무 시간 간격이 적으므로
하마한은 가야가 등장한 이후를 하마한이라 하는 게 낫겠다.
그러나 삼한 시대를 3분하는 것은 실제와 맞지 않다고 본다.
3분 방식 보다는 4분할 이상으로 구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중삼한, 하삼한은 학계에서 말하는 삼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하에서는 편의상 삼한으로 표기하도록 한다.
천관우 등이 주장하는 삼한이동설이 있다.
역사서에 한강 이북에도 삼한이 보이므로
삼한이동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삼한이동설의 문제점은 삼한을 종족 개념으로 본다는 데 있다.
만주에 있던 삼한 종족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종족 개념은 사서의 중국 피난민이란 사실과 맞지 않으니,
삼한은 종족이 아닌 시스템 즉 체계 개념으로 봐야 한다.
체게 개념으로 봐야 역사 사실과 부합하게 된다.
또한 삼국이 삼한 소국을 병합해서 성장한다는 성장 이론은 체계 개념으로 바꿔야 한다.
학계는 성장 이론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 신라와 가야의 전쟁을 부인하나 체계 개념으로 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2. 삼한의 성립 시기
1) 학계의 주장
학계는 삼한 성립 연대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설명한다.
진한은 진국의 이동으로 성립했다는 진국이동설과
북의 진한이 내려와 영남에 점차 정착했다는 삼한이동설이 있고,
변한은 가야가 성립되는 이후를
마한은 최근 기준이 익산에 내려와 설립했다는 설이 유력해져서,
북의 마한이 충청도에 정착했다는 삼한이동설과 대립하고 있다.
2) 기원전 194년이 삼한이 성립한 연대이다.
재성립된 마한이 진한과 변한을 정식으로 책봉하여
삼한의 체계를 갖춘 때를 삼한의 성립 시기로 봐야 한다.
진한과 변한이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의하면 기원전 194년 한탁이 월지에 이르러 중마한을 세웠고,
변한, 진한도 수도를 정하고 나라 이름을 정했다고 하였으니
마한이 재성립된 이후 변한, 진한도 정식 책봉된 것으로 보인다.
국로추사에 의하면 기원전 194년 10월 진한과 변한이 마한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로추사는 여러 사서의 출처를 적었는데 이 기록은 「마한사」란 역사서에서 나온 것 같다.
이를 보면 진한과 변한은 기원전 194년 이전에 이미 정치체가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기원전 194년 10월 정식 책봉이 행해졌고 삼한 체제를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한탁이 마한을 세웠다 했고,
국로추사나 청주한씨문중 기록엔 기준이 마한을 세웠다고 한다.
어느 설이 타당할까?
3. 기준의 익산 마한 건국설과 비판
위만의 쿠테타로 기준은 왕위를 빼앗기고 익산으로 남하해서 마한을 세웠다는
기준의 익산 마한 건국설이 학계에서 유력설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기준성 등 기준 관련 설화가 익산에서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익산 건국설은 평양이 조선의 수도라는 전제하에서 전개된 주장이다.
평양이 고조선 수도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쿠테타 세력은 외국 난민으로 난민 수가 아무리 많아도 원주민보다 적다.
기준이 바다로 탈출해서 인근 육지에 도착한 다음 군대에 생존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쿠테타 세력은 바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익산에 마한을 건국했다면 위만은 기준을 계속 추적할 것이고
결국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 기준의 군대는 쿠테타를 진압하지 않았을까?
기준의 통치에 불만이 있던 자가 많았거나,
종족 구성이 단일하지 않고 복잡하거나 등등 여러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준의 생사가 불확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평양이 조선의 수도라면 익산으로 남하한 기준의 동정을 몰랐을 리 없다.
평양이 조선 수도가 아니라면 기준은 어디로 향했을까?
후한서에는 마한을 공격해서 왕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당시 기준에겐 소수 인원만 남아 있어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후한서 기록은 틀린 것일까?
여기서 마한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준이 마한을 처음 건국한 것이 아니라 마한이 애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진한이 진나라 부역을 피하여 오자 마한이 동쪽 땅을 할양하였다는 기록과 연결되며
마한은 기원전 194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소수 인원으로 마한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환단고기에 의하면 기원전 194년 대장군 한탁이 오가 무리와 월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월지는 마한의 수도이다.
후한서에 기준이 마한을 공격했다 했으므로 기준도 월지에 있었다.
즉 소수 인원만 있던 기준에게 군대가 생긴 것이다.
기준은 왜 마한 수도인 월지로 갔을까?
단서가 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기원전 195년 최숭이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기준은 최숭을 찾아간 것이다.
마한의 서울 왕검성은 월지이고 여기는 평양이다.
기준은 평양을 갔으며 한탁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자 마한을 공격해서 왕이 된 것이다.
언제 왕위에 올랐을까?
국로추사에 의하면
기원전 194년 9월 기자를 추존해서 태조 문성왕으로 하였고 이후 40세에 걸쳐 왕호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9월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기준은 기원전 194년 11월 사망한다.
기준의 사망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음 왕이 한탁이 되고, 최숭이 낙랑왕이 됨을 볼 때 내부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숭이 낙랑왕으로 나오는 기록은 기원전 169년이므로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69년 사이에 낙랑왕이 되었다.
마한이 백제 온조왕에게 망한 때 수도는 충청도였다.
따라서 평양에서 충청도로 수도를 옮겼는데,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69년 사이 최숭이 평양에서 낙랑왕이 되므로
수도를 옮긴 이는 한탁으로 보이고 기원전 193년 수도를 옮겨 마한을 재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국로추사에 기원전 193년 3월 용화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쯤으로 판단된다.
환단고기에 한탁이 마한을 설립했다는 기록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크게 틀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후한서, 삼국지와 국내 문중 기록, 국내 역사서를 통해
충분히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왜 기준의 생사를 불명으로 처리했을까?
이하 사실 관계를 정리하면,
기원전 195년 병오년 겨울 최숭이 낙랑에서 마한 왕검성에 도착.
기원전 194년 정미년 위만 쿠테타로 기준 바다로 탈출.
기원전 194년 9월 기준 마한 왕이 됨.
기원전 194년 10월 진한과 변한 사신이 기준 마한 내조.
기원전 194년 11월 기준 사망
기원전 193년 3월 용화산에 축성
기원전 190년 2월 한탁 사망
4. 진한의 한국 진입
한국(韓國)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원문에 나오는 용어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진한은 노인이 말하길
진역(秦役)을 피하여 한국에 왔는데,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 주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그리고 진한의 말이 마한과 다르며 진(秦)나라와 유사하다고 하며,
낙랑은 진한의 남은 무리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최치원은 진한은 연나라 피난민이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조선 유민이라 하였다.
정리하면 진한은 중국 진나라 혹은 연나라 유민이 낙랑을 걸쳐 한국으로 온 것이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했고,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 209년이므로
연나라 유민이라면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9년 사이에 한국으로 진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진의 난리와 한초 통일 전으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조선으로 넘어 왔는데,
만약 이 시기라면 전란으로 표현했을 것인데 진역이라 표현했으므로
전란 이전에 한국으로 피난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만약 진나라 사람들이라면 한비자(기원전 281년? ~ 기원전 233년) 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고,
진역도 만리장성 축조 등 다양해진다.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으로 부를 정도로 언어가 유사하여 진나라 유민으로 단정하기 보다
진나라 사람들이 연나라로 연나라에서 다시 낙랑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므로
딱히 특정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진나라 유민이라면 진나라 사람들이 왜 머나먼 한국으로 왔을까 의문이 든다.
서안 인근에 한국인(조선인)이 살았고,
이들이 전국시대 한(韓)나라를 건국하는 등 활동하다가 본향인 조선으로
그리고 전쟁 피난지로 최적인 한국으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사기에서 조선 유민이란 표현은 낙랑이 조선이므로
진한인이 낙랑과 같은 부류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조선은 물론 평양이 아니라 조양시 등 요서 지역을 말한다.
5. 변한의 한국 진입
변한의 한국 진입은 삼국지 등 기록에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변한의 마지막 수도인 부안의 개암사 전설엔 기원전 282년이 보이는데.
진개의 난으로 잃어버린 땅의 유민들이 한국으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변한은 진한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한국에 진입하였다.
한편 군산 어청도에 산동성 전씨(田氏)를 모신 사당이 있어
제나라 유민도 전라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에서 26점의 중원식 동검이 출토되었다.)
변한은 익산을 수도로 하였다가 마지막에 부안까지 몰렸다가
기원전 39년 박혁거세 19년 진한 신라에 항복하였다.
익산에 기준 마한 전설이 있는 것은 변한을 기준과 혼동한 것으로 본다.
기준도 변조선왕이므로
변조선인이 익산에 건국한 변한을 구두로 전해 오다가 서로 착종한 것으로 생각된다.
진한만 유일하게 처음 6국이었다가 12국으로 늘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변한의 병합을 말하는 게 아닐까?
먼저 온 변한을 익산에 할양하였고 나중에 온 진한을 정반대 지역인 경주에 할양한 것으로 생각된다.
진한이 경주를 임의로 선택한 게 아니라 마한이 변한을 고려하여 경주에 할양한 것이다.
나주오씨문중족보에 나주는 변한의 땅으로 진한에 속했다가 후에 백제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벽골제 증축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기록되거나
고창 선운사가 진흥왕이 세웠다는 등등
학계의 통설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이 보이는 것은
익산에 있던 변한이 진한에 병합되었고,
이후 신라가 전 변한지역 현 전라도를 영유하였기 때문이다.
신라가 전라도를 잃게 된 것은 무왕, 의자왕 연간으로 보인다.
변한 이후 가야가 등장하였고 변진(弁辰)으로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되어
다시 삼한 체제가 되는데, 종전 변한과 구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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