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볼 논문은 쿠테타에 당한 기준이 이동한 곳에 대한 내용이다.
- 제목: 기원전 2세기 고조선 준왕의 남래(南來 )와 익산
- 저자: 송호정
- 출처: 한국고대사연구 78(2015.6.)
논문 제목에서 남래란 표현은 기씨조선의 수도가 평양임을 뜻한다.
평양이 기씨조선의 수도가 될 수 없음을 전에 게시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 난하임을 밝힌 글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국경선이 난하라고 하여도 수도는 평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 의문은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과정에서 알아 볼 수 있다.
한나라와 고조선의 육군 전투는 한 차례 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패수를 경계로 양 군이 때립하였는데 패수 상류에서 강을 건넌 한나라 군대를 막지 못해 위만조선군은 왕검성으로 들어가서 포위되었다.
즉 패수라는 국경과 수도인 왕검성은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난하나 혼하, 요하, 압록강이 패수고 수도가 평양이라면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투는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기씨조선과 위만조선의 수도는 다를 수 있으므로 기씨조선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번에 볼 주제인 “준왕의 이동”을 분석하는 의미가 있게 된다.
쿠테타로 왕권이 전복되었을 때 지역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을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왕과 태자 등이 죽어 보위를 이을 왕이 없거나
왕이 국가의 영토를 벗어나 군대가 이동하는 것이 무리인 경우가 있겠다.
여기서 수도가 평양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무리임이 밝혀진다.
왕이 살아 있고 황해도나 경기도 아니 멀리 전라도로 피신하였다 할지라도 기씨조선의 지방군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위만은 외국인이다.
위만이 쿠테타로 평양을 점령하였다면 기씨조선의 지방군이 위만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 사전 지식
가. 위만의 쿠테타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 수 만명이 기씨조선에 난민으로 들어와 운장이란 곳에 거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연나라 사람 위만은 기씨조선에 망명한다.
기준은 위만 일당과 위만을 분리시키고 위만은 수도 인근에 거하게 하되 직위를 주지 않아야 했었다. 그런데 난민 관리를 위만에게 맡긴 실수를 하였다.
위만의 쿠테타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인용한 위략에 기술되어 있다.
위만은 사람을 보내 한나라 군대가 여러 곳으로 쳐들어 왔으니 도성에 들어가 준왕을 숙위하고자 한다고 거짓 보고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위만이 있는 곳과 기씨조선의 수도는 거리는 멀지 않다는 것이다. 먼 곳이라면 기씨조선의 봉화 등 방어체계가 작동할 것이므로 이런 거짓말이 통할 수 없다.
위만은 수도 도성 가까운 곳에 미리 이동하고 전령을 보냈을 것이다. 즉 다급함을 이용한 것이다. 멀리서 전령을 보냈다면 수도로 들어오지 말고 한나라 군대를 막으라는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나라와의 국경과 위만이 있는 곳 그리고 기준의 수도는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국경 방어선이 무너졌고 한나라 군대가 곧 도착한다는 위기감을 기준에게 심어 줬기에 수도에 위만을 들어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위만과 기씨조선 수도의 이동선은 동서 방향이다.
여기서도 수도가 평양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만약 평양이라면 남북 방향이라야 맞기 때문이다.
수도 도성에 들어온 위만은 왕을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왕 호위대는 막는데 실패한다. 기준은 후퇴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수도 근처에 바다가 있음을 알게 된다. 조양시와 요양시는 강을 통해서 바다로 갈 수 있지만 너무 멀다. 평양이나 금주시, 후루다오시, 진황도시, 창려현 같이 바다에 인접한 곳이라야 한다.
난하 – 위만 – 수도 방향이며 바다가 있는 곳이므로 기씨조선의 수도는 금주시가 가장 타당할 곳으로 사료된다.
나. 기준이 간 곳은?
위만의 습격으로 혼이 빠진 왕 기준은 위만 무리를 피해 바다로 들어 갔다.
바다 위에서 갈 곳을 생각했을 것이다.
도성을 탈환해야 하므로 일단 육지에 내려서 군대와 연락을 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수도가 평양이라면 황해도나 경기도에서 상륙해서 군대와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기준이 살아 있으므로 수도 탈환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위략은 기준이 향한 곳은 한(韓)의 땅이고 그곳에서 왕이라 즉 한왕(韓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아니 도성을 되찾지 않고 왜 한이라는 곳에서 왕이 되었나?
급하게 이동하였으므로 사람 수도 적었을 것인데, 韓이라는 곳에서 사람들을 모아 또 왕이 되었다?
韓은 왕이 없었고 위세로 왕이 되었다는 뜻일 게다.
위략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같은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는 후한서 동이전을 보자.
기준은 위만에게 패한 뒤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파한 뒤 자립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해 진왕(辰王)이 되었다.
후한서는 수천 명이 바다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좌우 궁인만 데리고 갔다는 위략이 맞을 것이다. 급한 상황에서 소수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후한서는 수천 명이라 하였을까? 이는 후에 기준 왕에게 합류한 수를 포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후한서는 또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위략에서는 한(韓)이라고 하였지만 후한서는 마한이라 특정하였고, 마한이란 조직체가 있었고 그들과 다툼이 있었고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위략보다는 후한서가 더 현실적이다. 한이라는 곳이 비어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당연하게 조직체가 있었고 이와 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위략과 후한서를 종합하면 기준은 소수 사람만 데리고 일단 마한이란 곳으로 피난을 가고 후에 왕을 찾아 많은 수가 합류하였는데 마한 조직과 대립하게 되고 마한을 공격하여 이기고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
다. 마한은 어디인가?
학계는 기씨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고 위만에게 도성을 뺐긴 뒤 바다를 통해 남하하여 충청도나 익산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도가 평양이라면 기준은 위만을 공격해서 수도를 탈환하는 것이 낫지 마한에서 왕이 되려고 마한과 전투를 할 이유가 없다. 일단 마한에서 세력을 모으려고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기씨조선의 수도는 평양으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기준이 피난한 곳은 어디일까?
"평양"이다.
당시 한반도의 제1도시는 평양이다.
기준은 수도를 되찾고자 평양의 도움을 바랬던 것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당시 평양엔 최씨 낙랑국이 있었다.
최씨는 기씨조선에서 넘어갔는데 해모수가 부여 왕이 되는데 기씨조선이 도움을 줬기 때문에 비어 있던 마한의 왕위를 최씨가 차지하는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준은 최씨 낙랑국을 이용하여 위만을 공격하고자 평양으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장군 한탁이 기준에 합류하게 되어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낙랑과 기준은 알력이 있게 되고 기준과 최씨 낙랑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기준이 낙랑국을 이겼으나 기준의 사망으로 내분이 생기게 되고,
한탁이 남하하여 마한을 건국하고,
변한과 진한을 분봉하여 삼한 체제를 갖추게 된다.
변한은 전라도를 진한은 경상도를 다스리는데 익산에 변한을 설치하고 정반대인 경주에 진한을 분봉하게 된다.
그러다가 박혁거세 때 변한을 병합하게 되지만,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게 되고 가야가 남쪽에서 성장하여 변한과 진한 사이인 변진으로서 벡제의 마한, 신라의 진한, 가야의 변진이란 사실상 삼한이 성립하게 된다.
이 사실상 삼한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묘사된 삼한인 것이다.
2. 논문의 주장
① 익산 토광묘 유물의 조합상은 서북한 지역의 후기 청동기 문화와 매우 유사하다.
② 위략의 한(韓)이란 한반도 중남부 지역 정치집단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보인다. 준왕이 한지로 내려온 시점은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중서부지방 금강 이남 지역에서 주조철부를 동반한 청동기가 나타나는 시점과 일치한다.
③ 기원전 3~2세기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점토대토기 또는 세형동검문화를 영위하는 세력집단은 한(韓)이 아닌 진국(辰國)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④ 준왕이 남래한 지역은 토광묘와 점토대토기문화가 번성하고 집중하는 익산 지역이 가장 유력하다. 위략 기록상의 한(韓)은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전의 고조선 주민이 거주하였던 요동과 서북한지역으로부터 남하한 점토대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사회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연고가 있던 지역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하에서 점토대토기가 가장 번성한 지역을 준왕 세력의 정착지로 선택하였을 것으로 본다.
⑤ 진국 사회는 한강 이북의 진번군과 그 철폐 후에는 낙랑군 예하 남부도위와 직접 접촉을 가지는 한편 이들 유이민을 통하여 더욱 발달된 철기문화의 혜택을 받았다. 이에 따라 사회적 변화도 급속히 진전되었는데 그 결과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대두하게 되었다.
⑥ 익산 지역에는 목관묘가 등장하는데 준왕의 남래로 말미암아 전래된 새로운 매장 풍습이며, 마한의 조기 묘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후 서력 기원 전후부터 기원후 3세기에 걸쳐서는 마한 전기의 중심 묘제인 주구묘가 새롭게 축조된다. 이들 주구묘에서는 조기의 적석목관묘나 목관묘와는 신전장법 외에는 구조적인 속성이나 출토 유물에서 연속성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송국리 문화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준왕의 후손이 어느 시기에 절멸하고 마한인이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준왕의 남래 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온 집단은 외래계 세력으로 얼마간 우월적 존재로 있었지만, 강한 토착문화의 전통은 다시 부활하여 새로운 마한 전통의 문화를 유지해 나갔던 것으로 본다.
3. 논문 비판
① 고고학 문화와 특정한 정치 세력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요동반도 – 서북한 – 금강, 만경강 지역의 서해안 무역 루트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토광묘 등 문화적 유사성이 보인다고 종래 알려져 왔지만 이를 특정 세력으로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② 진국을 금강 ~ 만경강 유역에 비정하고 있으나, 사서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본다. 진국은 조선상 역계경이 위만의 후손 우거와 대립 시 등장하는 데 역계경이 간 곳은 동쪽으로 이 문제 역시 수도의 위치와 관련된 문제이다.
③ 진국에서 삼한으로 발전하였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으나 이것 역시 근거가 없다. 삼국지에서는 마한이 동쪽 영토를 할애하여 진한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반도는 마한의 영토였고 준왕과 마한의 전쟁 이후 한탁의 남하와 마한의 재건 그리고 진한, 변한의 분봉이라는 역사적 사실로 이어진다고 함이 옳다.
④ 익산이 고려사 지리지 등에서 종래 마한의 영토로 인식된 것은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이것이 와전되어 전래된 것으로 본다. 익산에 마한을 비정하면 변한과 진한의 위치와 균형이 어색해진다. 익산을 변한에, 경주를 진한에 비정하고 마한을 충청, 경기도에 비정해야 세력의 균형이 있게 된다.
⑤ 익산의 토광묘, 점토대토기 문화가 기원 전후 갑자기 소멸되는데 이는 박혁거세 때 진한에 의해 변한이 병합된 이유로 보인다. 이후 전라도는 진한 나아가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김제 벽골제 축조 기사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4. 결론
학계는 기씨조선의 수도가 평양으로 단정하다 보니 사료 해석과 사건의 경과에 의문이 드는 것이 너무 많다.
왕 기준은 실정으로 퇴출된 것이 아니라 외국인인 위만 집단에 의해 쿠테타로 수도를 탈출한 것이다.
수도를 탈출한 기준이 자기가 살아 있음을 군대에 알리기만 해도 위만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결과는 엉뚱하게 기준은 한(韓)이란 곳에서 왕이 되는데, 본인 영토와 신하들 그리고 조상의 무덤이 있는 땅을 놔두고 다른 곳에서 왕이 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쿠테타로 축출된 것이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므로 군대가 있었을 것이고 군대를 찾아가기만 한다면 수도를 탈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기준의 이러한 결과는 기준이 원군을 요청하러 갔으며, 어떤 사정으로 원군이 실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로 탈출한 기준은 가장 믿을 수 있고 강력한 세력을 찾았을 것이다.
그가 간 곳은 마한 즉 “평양”이었다.
당시 평양엔 최씨 낙랑국이 있었고, 최씨가 마한에서 세력을 가지게 된 것은 기씨조선과 부여의 도움 때문이었다.
기준은 일단 마한에서 최씨의 도움을 받고 다시 부여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양 국의 군대와 본국에 남아 있던 기준 군대와 연합하여 위만을 공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준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는데,
최씨가 기준과 알력이 생겼으며 이는 기준에게 기씨조선에 있던 한탁 군대가 합류하여 기준의 세력이 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쌍방간에 전쟁이 벌어졌으며, 기준이 이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된다.
한탁이 평양에서 남하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기준의 후계자 갈등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탁은 평양에서 남하하여 충청도에서 마한을 재건하게 되고 기씨조선의 유민을 경주 진한으로 봉하고, 익산에 변한을 봉하여 삼한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한편 운이 좋게도 위만은 기씨조선 내의 세력을 진압하여 위만조선이 되었으며, 부여와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는 등 국력을 키웠다가 우거 때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고구려는 동쪽 국경을 확장하려고 동부여, 낙랑을 정복하였다. 그러다가 남쪽에 공백이 생겨 후한이 광무제 때 평양을 점령하게 되고 평양이 한나라에 예속된다.
삼한에서는 의성 소문국이 강성했으며 진한에 신라가 건국하여 번한을 병합하게 되고, 백제는 건국 후 세력을 늘려 마한을 정복하게 되고, 가야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역사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동부여 가섭원의 위치 (1) | 2023.01.10 |
|---|---|
| 예군 남려와 창해군 (0) | 2021.12.04 |
| 신미제국(新彌諸國)과 삼한의 크기 (0) | 2021.09.12 |
| 기씨(위만)조선의 서쪽 국경 (0) | 2021.08.30 |
| 하마한 (1) | 2021.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