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문

예군 남려와 창해군

무극신 2021. 12. 4. 16:47

이번에 볼 논문은 예군 남려와 창해군에 관한 것이다.

 

- 제목: 창해군 위치비정의 쟁점과 전제

- 저자: 최슬기

- 출처: 고조선단군학 44(2021.4.)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지명을 현재 위치에 비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도대체 기준이 없다는 것에 있다.

 

요동, 요수, 평양, 패수 등 이런 지명이 시대에 따라 변동한다.

지명을 비정하기 위해선 절대적 위치를 통해 상대적으로 파악해야 하나 절대적 위치가 없기 때문에 혼란이 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도 역사학자들에 연구되어 학습된 것으로 그 연구가 잘못된 것이라면 상식도 맞지 않게 된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에 있는 지명을 대한민국의 땅에 비정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번에 볼 창해군도 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소개할 논문 저자 역시 논문에서 창해군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지 못하고,

기존 학설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는 기존 사서의 한계 때문이다.

관련 내용이 너무 적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고, 기본이라 할 위만조선의 영역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려에 관한 내용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어 어느 정도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사전 지식

 

 가. 중국 사서의 기록

 

  o 원삭 원년 가을 동이 예군(薉君) 남려(南閭) 28만명이 항복하여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원삭 3년 봄 창해군을 파하였다(한서).

 

  o 팽오가 조선에 장사하고 멸하여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이에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기울어지게 되어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사기 평준서)

    ※ 멸(滅)자는 예(薉)의 오자라고 후대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o 팽오가 예맥조선을 뚫고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연제 사이가 휩쓸려 소란해졌다(彭吳穿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사기 식화지)

 

  o 원삭 원년 예군 남려등이 우거에 반하여 28만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내속하게 되었다.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하였다가 수년 후 파하였다(후한서).

 

 나. 중국 사서의 이해

 

기원전 128년 예군 남려 등 28만명이 한나라에 항복해서 그 땅을 창해군으로 봉했는데, 관리하는 비용 때문에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소란하자 기원전 126년 창해군을 파하였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게 된다.

 

o 창해군 때문에 왜 북경(또는 보정시)에서 산동성까지 소란하게 되었는가?

o 28만명이 한나라로 온 것인가 아니면 그 땅을 한나라 군으로 만든 것인가?

 

 

2. 논문의 주장

 

 가. 기존 학설

 

  o 이익이 강릉을 창해군으로 보았는데 강릉을 예로 봤기 때문이다. 이후 안정복, 한진서가 따랐다. 정약용은 동부여를 강릉으로 보고 해부루 후예가 우거를 배반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유득공은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o 근대 일본 사학자 : 압록강, 동가강(白鳥庫吉), 영흥 순영면(池內宏), 소자하 상류 ~ 영흥(三上次男)

 

  o 한국 사학자 : 압록강, 동가강(이병도), 동해안(윤무병), 발해만 서부 연안(윤내현), 요동 남쪽(최인철), 요남 일대(권오중, 조원진), 요동반도와 압록강 중류(조영광), 태자하 유역(박노석)

 

 

. 논문의 주장

 

 o 위치 비정의 전제

  - 기원전 2세기경에 존재하였던 예맥은 위만조선의 주민을 구성했던 집단이며 기원후 3세기경의 예(동예)와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 창해(滄海)가 동해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 요동군과 창해군과 관련하여 기원후 2년을 기준으로 작성된 한서지리지로 기원전 2세기경의 요동군을 면밀하게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o 창해는 동해로 볼 수 없다.

 

 

3. 창해군의 위치

 

 가. 환단고기의 기록

 

  o 북부여 2세 단군 모수리 3년 기유년(기원전 192)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황제 동생 고진으로 수비하게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였다.

 

  o 북부여 3세 단군 고해사 42년 계축년(기원전 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적떼를 남여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o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 3년 계해년(기원전 118) 우거 도적떼가 대거 침략하여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두 우거의 땅이 되었다.

 

  o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 4년 갑자년(기원전 117)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o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 6년 병인년(기원전 115) 단제께서 몸소 정예 5천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o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 7년 정묘년(기원전 114)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南閭)에 두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였다.

 

 

 나. 남려(南閭)는 인명인가?

 

남려는 남쪽 고을이란 뜻으로 사람 이름으로 부르기는 어색하다.

지명이라면 한서 원문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동이 예군이 있는 남려 등 여러 곳 28만명이 항복했다라고 해석된다.

또는 예군이 있는 곳과 남려 지역 등 28만명이 항복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남려를 인명으로 하여 예군인 남려 등 28만명이 항복했다라고 하면 28만명의 이동이란 문제가 생긴다.

남려를 지명으로 보면 남려 등 여러 지역이 항복한 것으로 인구 이동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남려는 지명이다.

 

 

 다. 남려의 위치는?

 

환단고기에도 남려의 위치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다.

그러나 남려가 위만조선과 부여와의 전쟁 속에 등장하고 있고, 해성이 주요한 전투지로 나오고 있음을 보아 그 위치를 대강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성은 현재 해성시로 기원전 192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니 중부여가 복종한 기사에서,

당시 일반인은 부여를 북, , 남으로 구분하였고, 해성시는 중부여와 관련된 주요 요충지로 판단된다.

즉 해성시가 남부여와 중부여가 맞닿은 관문으로 보인다.

 

남려는 이름으로 보아 남부여에 속한 곳으로 생각된다.

 

해성시와 남려를 기록한 연대가 다르므로 해성시를 남려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보면 남려는 군사 주둔지로 보인다.

기원전 114년 위만조선을 방어하는 주요 장소로 좌원과 남려를 들고 있다.

그리고 해성시는 단군조선 때는 평양이기도 하였던 행정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해성시는 남려가 아니다.

 

남려가 위만조선의 군사 방어선에 있으므로 위만조선과 경계에 따라 남려의 위치가 결정되겠는데,

경계가 요하라면 반금시가,

국경이 대요하라면 영구시나 대석교시가 고려된다.

 

 

. 창해군의 범위와 예군의 소재

 

항복하였다는 28만명은 하나의 성읍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상당한 숫자이다.

후에 한사군 중 최대 군인 낙랑군의 인구가 40여만이었다.

 

따라서 창해군은 반금시, 북진시, 태안현, 영구시, 대석교시, 요동반도 서쪽 도시까지 합친 인구수일 것이다.

 

예군이 소재하던 곳과 남려가 다를 수도 있다.

남려는 군사 요충지이므로 예군의 거소는 행정 중심지일 가능성이 있다.

 

창해군의 위치

 

 

 마. 왜 한나라에 항복했나?

 

남려는 위만조선과 부여의 경계에 있어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사건이 벌어진 기원전 128, 환단고기에 따르면 남려는 양국의 관할이 수시로 바뀌게 된다.

기원전 128년 부여는 남려성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후한서에 의하면 예군이 우거왕을 배반했다 하였으므로 부여의 점령은 일시적으로 판단된다.

즉 남려성은 1년 사이에 위만조선 부여 위만조선 한나라로 관할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예군은 위만조선과 부여 양국 사이에서 강국인 한나라를 끌여들어 지역의 안정을 꾀하였던 것이며, 한나라의 회유도 있었을 것이다.

 

창해군 지역은 바다로 진출하는 진출로이며, 어업과 농경의 경제 이권으로 부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

위만조선은 부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창해군 지역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며,

양국의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은 격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 창해군의 설치 여부와 이후 영향

 

예군이 한나라에 항복하여 어부지리를 얻은 한나라는 산동성을 통해 바다로 연결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창해군 설치와 유지를 위한 한나라의 노력은 연나라와 제나라의 백성들을 동요하게 하여 결국 시도 3년만에 철폐하고 만다.

창해군은 설치 시도만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이후 남려 예 지역은 다시 위만조선과 부여의 전쟁터가 되는데,

기원전 118년 부여는 해성시까지 점령되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등 양국의 전쟁은 상당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예군이 한나라에 항복했던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들 지역은 한나라에 위만조선을 공격해 달라고 청원하게 되고,

이 청원이 결국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공격한 빌미가 되었다.

 

 

. 후한서와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의 위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예의 위치에 대한 설명에서 남쪽은 진한, 북으로 고구려, 옥저에 접한다고 되어 있어, 진한을 경주로 간주하여 강릉 등 동해안으로 생각함이 현재 상식이다.

그러나 또 조선의 동쪽이 모두 예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조선은 조양시를 말한다.

 

해석의 착오는 진한 때문인데, 삼한의 크기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삼한이 한반도와 일본 구주 요동반도까지 포괄하므로

진한도 현재 경상도로 한정할 것이 아니다.

 

염사치 설화에서 한나라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벌목을 하던 곳이 진한인데 압록강 산림터로 생각된다.

 

고대 지리 위치를 추정할 때 상식과 편견에 빠지면 안된다.

 

 

4. 결론

 

창해군은 영구시, 대석교시, 반금시, 요동반도 서쪽 도시로 판단된다.

 

학계는 위만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창해군의 위치를 판단하는 데 혼란을 주었다.

창해군은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었는데, 위만조선을 평양으로 설정하다 보니 한나라가 창해군을 설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 창해군을 설치했다는 중국 사서와 맞지 않게 된 것이다.

 

위만조선을 요서에 비정하면, 요하 동쪽의 관할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학계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어, 위만조선의 영토를 계속 평양과 요동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답하는 것이 불가능한 여러 의문이 계속 끝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 점에서 설명이 명쾌하다.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조선은 계속 요서에 있었으며,

요동은 진조선 그리고 후에 부여로 이어지며, 다시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위만조선이 영토를 동으로 확대하면서 부여와 위만조선 간 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국경에 있던 남부여 예 지역은 전쟁터가 되자 지역의 안정을 위해 예군은 한()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비용 문제로 창해군의 설치가 무산되자 남부여 지역은 다시 전쟁터가 되고,

이들 지역은 한나라 무제에게 위만조선을 공격해달라는 청원을 계속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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