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문

졸본의 위치

무극신 2023. 1. 16. 01:29

1. 한국 고대사 지명 위치 비정의 혼란 : 같은 이름

 

학계가 우리 고대사 지명을 현 위치에 비정하는 것에 혼란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같은 이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평양, 패수, 니하, 살수 등과 같은 것들이다.

 

심지어 국가 이름에도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한반도의 신라, 안라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서기의 신라, 안라로 등장한다.

 

고구려 역시 그러하다.

구려, 고려, 고구려, 고리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구려는 우리가 아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그 고구려가 아니다.

 

주몽에 의해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했음에도 그 이전부터 고구려가 등장하기에 고구려 역사가 축소되었다라거나, 선고구려인 등의 논란이 있었으며,

졸본의 위치까지 엉뚱한 곳에 비정하게 된다.

 

2. 졸본의 환인 비정 과정

 

환인에 졸본이 있었다는 것이 현재 한국, 중국, 일본 학계의 통설이며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착오의 시발은 삼국사기에서 시작된다.

삼국사기는 졸본을 북진시로 비정하며 현도군이 의무려산 일대에 있었으므로 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도 그 위치로 판단한 것이며, 삼국유사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었다.

 

졸본의 위치 비정에 현도군 고구려현과 연계 시킨 것이다.

 

안정복은 현도군은 무순에 있었으며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현토를 경유하고, 고구려가 중국에 품명할 때도 현토를 경유하였으니 졸본과 현토는 가까웠고 졸본을 흥경 동남쪽으로 비정하였으며 비슷하게 정약용은 흥경 북쪽으로 비정하였다.

 

안정복, 정약용 역시 졸본과 현토군을 관련지었다.

 

환인이 졸본이 된 것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부터이다.

부여 일부가 남하한 진번이 동가강 유역에 세워졌으며 진번과 홀본이 이름이 비슷하고 올랄산성(오녀산성)이 흘승골성이라고 하였다.

이병도는 진번만 현토로 바꾸고 환인 졸본설을 답습하였다.

 

졸본 환인설이 통설이 된 것은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무덤의 영향도 크다.

집안을 국내성으로 보았기에 그 이전 수도를 가까운 곳에서 찾았던 것이다.

 

 

3. 졸본 현토 관련설 비판

 

시라토리의 설은 진번이 동가강 유역에 세워졌다는 가정에서 시작하는데 그 근거가 없고 진번과 졸본의 음이 유사하다는 것도 억지에 가깝다.

 

시라토리를 제외하면 졸본이 환인이 된 것은 현토군과 관계가 있다.

그 시작은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다.

이후로 줄곧 졸본의 위치 비정에 현토군과 관련지어 생각하였다.

 

졸본을 현토군과 관련지은 근거는 다음에 있다.

현토군 속현으로 고구려현이 있다는 점

고구려가 중국과 소통하기 위해 현토를 경유하였으므로 현토군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점.

 

을 비판하면

현토군 고구려현과 고구려는 서로 다른 존재인데 이름이 같아 김부식이 착각하였다.

이는 안정복에 의해서도 비판되었다

.

삼국사기에 유리왕 33년 군사 2만으로 양맥국을 멸망시키고 현토군 고구려현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현토군 고구려현과 고구려는 서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처음 옥저성이 현토군이 되었으나 이맥(夷貊)의 침략으로

기원전 75년 구려(句麗) 서북으로 옮겼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 있다.

 

여기 구려 또한 고구려가 아니다. 기원전 3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기에 구려와는 다른 나라인 것이다.

 

를 비판하면 졸본이 현토군과 가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더 멀리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구려에 5부가 있다고 하였다.

순노부, 절노부, 계루부, 관노부, 연노부인데 이 5부는 고구려로 통합되기 전에 하나의 국가였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에 멸망되는 여러 국가가 보인다.

개마국, 구다국, 비류국, 행인국, 낙랑국, 양맥국, 동부여 등이며 황룡국도 보인다.

 

이들 국가는 고구려에 멸망되어 일부가 5부로 재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졸본이 현토군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잘못이다.

 

 

4. 졸본의 위치 비정

 

졸본을 찾기 위해서는 삼국사기 기록에 유의해야 한다.

 

주몽은 대소 등과 갈등하여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다.

엄표수(개사수)를 건너 추격해오는 동부여 기병에게서 벗어났으며,

모둔곡에서 재사, 무골, 묵거를 만나고,

그들과 졸본천에 이르렀다.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하여 도읍으로 하였고 궁궐은 짓지 못해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 아들이 없어 딸을 아내로 삼게 하고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말갈 부락과 인접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사냥을 하며 비류국에 올랐다.

 

위서(魏書) 동이전 고구려에서는

 

주몽이 오인, 오위 둘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는데,

큰 물(一大水)를 만나 자라 도움으로 물을 건넜으나 기병은 건너지 못했고,

보술수(普述水)에서 3인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위서는 내용이 거의 같다.

 

사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큰 강을 만났으며, 이 강이 동부여와 경계로 보인다는 점.

모둔곡에 도착한 점.

이미 졸본부여가 있었으며 이름에 부여가 붙는다는 점.

비류수가에 궁궐없이 지낸 점.

 

바다를 건너지 않는 이상 바다 옆에 있던 동부여에서 주몽이 탈출할 곳은 북부여 뿐이다.

주몽 일행이 건넌 큰 강은 북부여와 동부여의 경계였을 것이다.

강 너머도 동부여 땅이라면 추격은 계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너머 국가 간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감수하고 주몽을 추격할 필요는 없었다.

대소 등이 주몽을 경계한 것은 주몽이 동부여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큰 강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엄리대수로 나오며 강을 따라 흘러가면 북부여로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란강이나 무링강을 이용하면 목단강시에 도달하며 이곳이 주몽의 목적지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압록강이라 주장하나 동부여 중심지가 송화강이나 흑룡강인 이상 압록강은 불가능하다.

 

위서에서 동남 방향(광개토대왕릉비는 남하로 기록)으로 도주하였다고 하여 이에 집착하는 분도 있으나,

직선 도로가 아닐 것이며 사정에 따라 도주로가 자주 변경될 수 있을 것이므로 방향은 의미가 없다.

 

위서에서 주몽 외 2인이 도주했다 하여 삼국사기 등 국내 사서의 3인과 숫자가 다른 것은 협보가 유리왕 때 고구려를 떠나 마한으로 이주해서 현재 일본 규슈로 이주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주몽 동부여 탈출로 : 무링강 이용시

주몽의 목적지는 모둔곡이었을 것이다.

위서에서는 보술수라고 하였는데 모둔곡이 보술수에 있었을 것이다.

보술수는 엄리대수의 지류로 보인다.

주몽 일행은 강을 건너 육로로 가기 보다는 강을 이용해서 내려갔고,

지류인 보술수로 흘러가 모둔곡에서 내렸을 것이다.

 

모둔곡 3명과 함께 졸본천에 도착해서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행 6명으로 무슨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모둔곡의 3명은 지역 유지로 모둔곡 사람들이 처음 주몽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세력이 커지게 되고,

이웃 나라인 졸본의 사위가 되어

졸본과 모둔곡을 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본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비류곡 홀본 서성산 아래에 도읍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졸본천을 도읍지로 하고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것과 같다.

참고로 궁궐은 주몽 4년에 건축된다.

 

위서에서는 흘승골성이라 했으므로

도읍지는 졸본천이 있고 비류수가 있으며 흘승골이라 불리는 곳이며 졸본부여의 땅이다.

 

그런데 졸본에 이미 왕이 있었으므로 도읍지가 있었는데 졸본 도읍지는 이용하지 않고 새로운 곳에 터전을 잡았는데,

이는 기존 졸본 세력을 경계한 것이고 모둔곡을 의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고구려의 도읍지는 졸본 땅에 속하지만 기존 졸본 왕성이 아니라 새로운 곳이며 졸본천과 비류수가 있는 곳이고, 부여라 불릴 정도로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고 비류곡으로 비류국과 국경을 이루는 곳이다.

 

여기서 졸본의 경계를 설명하는 기록이 있다.

 

북쪽은 비류국, 동쪽은 낙랑국, 남쪽은 섭라로 경계하고 있다고 한다.

서쪽을 말하지 않는 것은 큰 산으로 막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섭라국은 두만강 건너 북한 회령 등을 말하며 낙랑국은 혼춘과 연해주로 생각된다.

따라서 졸본은 현재 연변이 그 중심지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구려 건국지는 졸본과 모둔(순노), 비류의 경계인 지금 둔화시로서,

부여라고 불릴만한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으며 모란강, Shahe , Huangni 강 등이 있다.

 

졸본의 경계 기록은 남당 박창화가 일본 왕실 서고에서 필사한 추모경에 있다.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에 대해선 학계에서 진위 여부를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추모경에 대해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현재 학계는 거의 발전이 없는 상황에 빠져 있기에 이들 책의 연구를 통해 마인드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추모경은 난잡한 성관계에 대해 심하게 거부감이 들지만 왕실과 귀족 문화에 흉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당시 성문화로 이해하고 역사와 지리에 집중한다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추모경에 의하면 목단강시가 순노국이며 남쪽으로 졸본과 경계를 이루었다.

 

참고로 추모경에서는 책성에서 엄리수까지 도달하는 데 60여일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리하면

 

1. 현토군 고구려현, 구려는 고구려와 다른 나라이다.

2. 환인을 졸본으로 비정하는 이유인 현토와 가까워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반대가 되는 사유가 된다.

3. 주몽이 건넌 엄리대수는 모란강이나 무링강이다.

4. 지류인 보술수 모둔곡이 주몽이 목표한 곳이다.

5. 주몽은 졸본국의 사위가 되었고 졸본과 모둔(순노)이 합해서 고구려를 새로 건국하였다.

6. 고구려는 졸본과 모둔(순노), 비류의 경계에 세워졌고 지금 둔화시이다.

7. 졸본의 중심지는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고구려 건국지 : 둔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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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8. 추가>

 

추모경에서 엄리수를 확인할 수 있는 문구를 발견하였기에 내용을 추가합니다.

 

동명 9년(기원전 29년)  2월 낙랑과 국경을 정했는데 죽령(竹岺) 동쪽을 낙랑의 땅으로 하고, 엄리수 동안과 남안을 순노의 땅으로 하였는데, 이곳은 남옥저의 옛 땅이었다.

 

이로써 엄리수는 무링강(목능하 穆稜河)이 확실시 됩니다.

기원전 29년 엄리수 동안과 남안 순노 귀속(※ 위치만 알기 위해 원을 대강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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