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계의 주장
황룡국도 전문적으로 다룬 학계 논문이 없다.
다음에서 조회하여 다음 백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이 학계에서 논의되는 전부라 하겠다.
⓵ 환인 지방 근처에 위치한 소국(다음 백과).
⓶ 고구려 주변에 있던 나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⓷ 해명태자 사건을 통해 고구려가 처음 성립했을 당시 주변의 다른 소국들과 공존하면서 대단히 조심스런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발전과 함께 황룡국도 병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다음 백과).
⓸ 해명태자 사건에서 고구려 초기의 국가 규모 내지는 능력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삼국사기 해명태자 사건
삼국사기에 기록된 황룡국왕과 해명태자와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⓵ 유리왕 27년 봄 정월 왕의 태자 해명(解明)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다.
해명은 힘이 세고 용감하였는데 황룡국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强弓)을 주었다.
해명은 그 사자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이 굳세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룡왕이 수치스러워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황룡에게 알려(告黃龍) 말하기를 “해명은 자식으로 불효하였으니 과인을 위하여 청하니 죽여 주시기 바랍니다”
3월 황룡왕이 사자를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어떤 이가 간하길 “지금 이웃나라에서 이유 없이 보자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어찌 하겠는가?”가고 말하며 태자가 갔다.
황룡왕은 처음엔 살해하기로 모의하였으나 만나 보고 감히 해할 수 없어 예를 갖춰 돌려 보냈다.
⓶ 유리왕 28년 봄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국가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인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에 교만하여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칼을 주면서 자결토록 했다.
태자가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누군가 말리며 말하길 “대왕의 장자가 이미 사망하였으니 태자께서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사자가 와서 자결하라고 하였다 하여 그것이 사기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하길 “전에 황룡왕이 강궁을 준 것은 내가 우리 국가를 경시할까 염려되어 활을 부러뜨려 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의 견책을 받았다. 부왕이 불효로 칼을 내려 자결케 하니 명을 어찌 피하겠는가?”
여진(礪津) 동쪽 언덕에 가서 땅에 창을 꽃아 놓고 말을 달려 창에 부딪혀 죽었다.
21세로 태자의 예로 동원(東原)에 장사를 지내고 사당을 세웠다. 그 땅을 창원(槍原)이라 한다.
3. 황룡국의 위치
1) 해명태자 사건의 해석
삼국사기에서 해명태자 사건만 놓고 보면 황룡국은 고구려를 상대할 정도로 강국으로 보인다.
위의 다음 백과나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오류이다.
유리왕 14년 동부여의 고구려 침입 병력은 5만이다. 이는 고구려의 강함을 의미한다.
황룡국이 고구려를 상대할 정도로 강력하다면 황룡국과 고구려는 갈등을 피할 수 없고 당연하게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없다.
삼국사기에서 누락되었을까?
황룡국보다 약한 것으로 보이는 구다국의 병합도 있는 것으로 보아 황룡국의 고구려 병합이 누락될 이유가 없다.
유리왕 이후 황룡국 병합 사실이 없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주몽 때 이미 황룡국은 고구려에 병합된 것이다.
주몽 세대 이후를 맡은 유리왕은 고구려를 수성하는 일에 전념했다고 생각된다.
해명 태자에게 말했듯이 도성을 옮긴 것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유리왕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었이었을까?
그것은 자중지란이다.
유리는 동부여에서 왔기에 기반이 약했다.
송씨 처가로 수도를 옮긴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소서노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유리왕은 주몽과 함께 정복 전쟁으로 고구려를 키운 것도 아니다.
주몽의 정복 전쟁이 끝날 즈음에 와서 과실만 따먹은 셈이다.
유리왕이 처신을 잘못하면 고구려가 공중분해 될 위험성이 다분했다.
더욱이 추모경에 의하면 황룡국왕은 “오이”였다.
유리왕이 해명태자를 자결케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고구려는 봉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황룡국왕을 책봉하였다면 황룡국은 형식상 자치 국가이다.
황룡국왕의 여하에 따라 고구려에서 독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근 소국과 조심스런 관계라거나 국가 초기의 규모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등의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황룡국의 위치
후대 선비 모용씨가 조양을 점거해서 용성이라 하였는데 중국 남조에서 황룡국이라 했다고 한다.
모용씨 황룡국과 고구려 황룡국은 다르므로 조양에 비정하면 안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든다.
고구려는 인접 국가를 병합하면서 성장하였다.
구다국, 개마국, 행인국, 비류국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황룡국은 병합을 하지 않았을까?
추모경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주몽은 황룡국은 옛 나라이므로 멸망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黃竜 旧國 不可伐以滅之 久而銷之未晩故 吾故以烏伊臥而治之也)
옛 나라란 북부여를 말한다.
황룡국은 북부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황룡국은 장춘 인근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주몽 10년 가을 9월 난새가 왕대(王臺)에 모였다는 기사가 있다.
주몽 6년 가을 8월 신령쓰런 까치가 궁궐에 모였다는 기사가 짝을 이루는 것인데,
주몽 6년 궁궐은 졸본을 말하며, 10년 왕대는 다른 곳을 말한다.
환단고기에 보면 을미년(주몽 12년 기원전 26년)에 수도를 눌현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며 눌현은 상춘 주가성자라고 하였다. 상춘은 장춘을 말한다.
추모경(주몽 9년 8월)에 보면 새로운 궁궐은 황룡국의 동쪽 서울의 옛 터라고 하였으니,
황룡국은 서울이 여러 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추모경에서 황룡국왕이 있는 곳이 “두눌(杜訥)”이라 하였는데, 환단고기의 눌현과 같은 곳인지 의문이다.
장춘에 고구려 서도가 있었다면 황룡국성은 장춘 위인 농안으로 생각된다.
후대 금나라의 황룡부가 있던 곳이라 한다.
황룡국은 길림시를 보호하기 위해 동요하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였을 것이다.
※ 주몽의 도읍은 주몽 1년 서성산 아래 → 주몽 4년 골령에 동명신궁 건축(동도(東都)라 칭) → 주몽 12년 황룡국 동도 옛 터에 새로운 궁궐 건축(서도(西都)라 칭)
그렇다면 황룡국은 언제 망하였을까?
남당 박창화 고구려사략 산상왕기에서 발기가 “두눌”로 가서 칭제하였다는 기록이 참고된다.
두눌에서 반란하였으나 산상왕 원년 9월 계수에 의해 함락되었다.
황룡국이 유리왕 이후 보이지 않는 것은 발기의 반란으로 소급해서 관련 자료가 삭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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