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계의 주장
비류국이 비류나로 바뀐 예에서
환나부가 고구려에 합류하기 전에는 환나국으로 독립된 국가임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삼국사기에서 환나부가 처음 보이는 예는 태조왕 때 주나 정벌이다.
따라서 태조왕 이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인데, 삼국사기로는 확인이 안된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에 5부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환나부가 없다.
따라서 환나부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순노부라는 설과 계루부라는 설로 나뉘며,
환나부가 순노부라는 설은 그 위치를 장백현 일대에 비정하였다.
장백현을 구글 지도에서 보면 거의 산이고 마을 몇 군데 보일 뿐이다.
학자들은 국(國)을 뭘로 생각하는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삼한을 보면 국(國)은 대개 오늘날 시군(市郡) 단위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간단히 요하 동쪽을 고구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넓은 땅에 5부만 있다고 생각하면
고구려의 국(國)은 몇 개의 시군을 합친 규모라고 생각해야 한다.
추모경에서 비류국이 탕동, 탕서, 탕북 3개의 군으로 나뉘어졌음을 생각하면
국(國)의 규모에 대한 추정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인구가 적었음을 생각하면 국가의 역량에 따라
국(國)의 규모에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고 쉽게 추정이 가능하다.
2. 환나부와 고구려 5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는 5족이 있다고 하고,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를 들고 있다.
本有五族,有涓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후한서에서는 연노부가 빠지고 소노부(消奴部)로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소노부를 연노부로 오기하였다고 본다.
한자로 보아 둘 중 하나는 오기로 보이는데, 학계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소노부가 오기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박창화 자료 고구려사략에서 연나부가 유리왕 때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자가 틀리지만 삼국사기에서 대무신왕 때 갈사국왕이 항복하자 연나부(掾那部)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노부(涓奴部)와 연나부(掾那部)가 다른 곳일까?
박창화 고구려사략에서 차대왕 때 명림답부를 연나궁(椽那宮) 조의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涓奴, 掾那, 椽那 연 한자가 다르지만 같은 곳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삼국지 연노부가 맞고 후한서 소노부가 오기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5부를 보면, 다른 부는 다 외자인데 계루부만 두 글자이다.
고구려에 복속된 국가 이름을 보면,
행인, 개마, 구다, 비류, 낙랑, 황룡, 졸본, 부여 등 국가 이름이 두 글자이다.
그런데 5부는 연, 순, 절, 관으로 계루를 제외하고 한 글자이다.
따라서 고구려 5부는 기존 이름을 해체하고 새로 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계루만 두 글자일까?
이는 누군가를 기리기 위함이 아닐까.
박창화 고구려사략 유리왕 3년 소서노를 위하여
순노, 절노는 미추홀에서 비류가, 관노, 계루는 우양에서 온조가,
연나, 황룡, 비리, 행인, 구다는 유리와 소서노가 통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순노가 동에 있으므로 동쪽은 비류가, 남쪽은 온조가,
기타 지역은 유리왕이 통치하는 것으로 지역을 나눈 것이다.
우양은 졸본의 수도이므로 관노와 계루 중 한 곳이 옛 졸본 지역이 된다.
그런데 태조왕 20년 관노부를 시켜 조나를 공격하도록 하고,
태조왕 22년 환노부로 하여금 주나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나, 주나는 동부여 속국으로 이 기록으로는 관노와 계루 어느 곳이 더 동쪽인지 구별은 안돼지만,
남쪽이란 위치에서 관노부는 이름이 같은데, 환노부가 등장하여
환노부가 계루부임을 알 수 있다.
3. 계루부와 환도성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에 5족이 있다고 하면서,
본래는 연나부가 왕이 되었는데,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대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本涓奴部爲王,稍微弱,今桂婁部代之
학계에서는 이 의미를 주몽의 비류국 병합을 말한다는 것이 다수설이고,
소수설에 태조왕 때라는 설과 산상왕 때라는 설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지금"은 동천왕 때를 말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이미모가 관노부(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위궁(位宮)이며
지금 고구려 왕 궁이 이 사람이다 하였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백고가 죽고 아들이 둘 있는데, 발기와 이이모이고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하자 연노부 대가와 하호(下戶) 3만과 함께 공손강에 항복하였고, 항복한 호(胡)마저 이이모에게 반항하자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고(伊夷模 更作新國) 지금 소재가 이곳이다(今日所在是也)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왕 이름은 완전히 착오인데,
백고는 신대왕이고 이이모는 고국천왕이며,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발기와 위궁이 왕위를 다투고 왕후에 의해 위궁이 선택되어 산상왕이 된다.
그리고 산상왕의 아들이 없어 주통촌의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았고 이가 동천왕이다.
즉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고쳐 해석해야 한다.
이이모 → 위궁(산상왕), 위궁 → 우위거(동천왕)
여기서 우리는 중국 기록의 한계를 알 수 있고, 중국 기록을 맹신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깨닫는다.
논외로 고국천왕과 관련해서
지금 국사 교과서에도 왕위가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다고 실려 있는지 모르겠다.
주몽 – 유리왕 – 대무신왕 모두 왕위가 부자로 이어졌는데 무슨 형제상속인가?
민중왕, 산상왕 때 형제로 왕위가 승계된 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우리 역사에서 심지어 고조선 때도 왕위가 형제상속된 경우는 없었다.
학계의 선배 학설에 대한 무비판적적 수용은 정말 고쳐야 할 병이다.
다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문구는
연나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한다는 구절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에는 연나부에서 왕이 선출되었는데 지금은 계루부에서 선출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된다.
왕은 선출하는 존재가 아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은 중국 기록의 한계로 고구려 부의 개념을 단단히 오해한 것이고,
연나부가 있는 곳에서 왕위에 올랐지만 지금은 계루부가 있는 곳에서 왕위에 오른다고 해석해야 한다.
즉 수도를 옮긴 것으로 해석해야 맞는 것이다.
산상왕의 다시 나라를 만든다(更作新國)는 구절은
요사지리지에서 환주(桓州)는 고구려의 중도성(中都城)이고
고구려 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삼국사기에 산상왕 2년 환도성(丸都城)을 쌓았고, 13년 겨울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박창화의 고구려사략에서
산상왕 13년 10월 우산(牛山)으로 옮기고 환도라고 이름을 개명했다고 하며
환도는 본래 계루(桂婁)의 도읍이라고 하였다.
계루부의 도읍이 환도이고 이곳이 고구려의 중도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계루부, 관노부 중에서 동쪽은 관노부임을 알 수 있으며,
관노부가 옛 졸본국임을 추정할 수 있다.
계루부는 환노부이니, 곧 환노부의 수도가 환도이다.
그렇다면 환도는 어디일까?
장춘, 길림의 남쪽이고 졸본의 서쪽이면 통화시가 유력하다.
백산시는 탈출로가 없어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있고, 환인은 요동과 가깝다.
통화시가 수도라면 통화시와 가까운 집안은 고구려 귀족의 무덤을 조성한 곳이다.
집안을 수도라고 하는 학계는 도대체 수도의 기능을 생각해보는 걸까?
계루가 특별한 이름이라고 보았는데,
추모경과 고구려사략에 의하면 계루는 환나국의 여왕으로서 주몽 2년 고구려에 항복하였고,
주몽의 황후가 되어 소서노가 민정을 맡고,
계루가 군정을 맡았으며 전쟁에서 주몽을 보위하였는데,
구다국과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그 상처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주몽과 계루의 아들인 고루는 대무신왕의 동부여 정벌 때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고 한다.
고구려 5부에서 환나부를 계루부라 한 것은 계루황후를 찬양하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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